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대신 내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면 인건비를 지원해 주겠다. 참 반가운 뉴스인데 댓글이 재미있다. 일자리의 질은 신경도 안 쓰는구나. 

 

인류역사에서 오로지 사무직만으로 일자리가 이루어진 사회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도 공사장 잡부가 있고, 물류센터 분류원이 있으며, 하수도 청소원이 있다. 그런 일자리까지 모두 포함해서 고용률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일 하는 사람까지 모두 포함한 수치가 실업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건설현장에서 내국인 더 많이 쓰라고 정책을 내놨더니만 일자리의 질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뭔 뜻이겠는가?

 

내 월급은 많이 받고 싶다. 그러나 다른 사람 월급 오르는 최저임금인상은 반대한다. 나는 정규직 되고 싶다. 그러나 다른 사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바뀌는 건 반대한다. 나는 더 많이 쉬고 더 많은 권리를 보장받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만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 젊은 층이 주장하는 공정의 정체다. 이준석 자신이 말하고 있지 않던가. 모든 사회적 보조나 지원을 폐지하고, 해고도 자유롭게 해야 청년층 일자리가 생긴다. 승자독식도 공정이다. 내가 그런 독식의 위치에 서고 싶다. 즉 나머지 일자리는 도태된 이들을 위한 징벌이어야 한다.

 

마르퀴 드 사드가 주장했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 첨예화 극단화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청년세대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욕망의 수준이 높아졌다. 그들의 현실은 실제의 현실에 있지 않다. 그들의 현실은 미디어가 만든 관념 속에 존재한다. 오로지 그것들만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밖의 현실을 부정한다. 현실에 실제 존재하는 일자리들조차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념을 충족할 일자리를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기성세대를 증오하는 실제 이유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정작 그들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은 4050의 기성세대다. 사실 건설현장 역시 2030보다는 4050의 지원비율이 더 높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 놓인 기성세대와 아직 미래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는 2030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2030은 더 위를 바라봐야 하고 그들에 자신을 맞춰야만 한다. 그래서 노동소득보다 부동산이나 주식, 가상화폐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들만이 자신을 승자로, 가상세계의 자신에 어울리도록 끌어올려줄 수 있다.

 

현실이란 진흙탕을 허우적거리며 뒹굴기보다 우아한 가상세계속 자신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한다. 사실 출산률이나 혼인률도 이와 아주 무관치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평균적인 삶이란 역시 현실에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기대치는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렇다고 기대치에 맞춰 현실을 바꾸려 하면 그로 인해 자신들이 바라지 않는 징벌의 대상들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간다. 그건 싫다.

 

그래서 이준석인 것이다. 딱 이준석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준석의 논란에도 어째서 20대 남성들은 분노하지 않는가. 부모가 서울대 출신이라지 않은가. 유승민 의원과 친분이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준석 자신이 하버드 출신이다. 언론이 다루어주지 않는다. 그들의 자아는 미디어 속에서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란 오히려 인터렉티브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첨예화된 가상공간이란 것이다. 인터넷속에서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때로 혼동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면 과연 그런 대단한 자신이 실제 현실의 자신일 것인가.

 

아무튼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댓글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당장 일자리가 없어도 공사장에는 나가지 않겠다. 그러므로 내가 할 만한 편하고 안전하고 깨끗한 일자리를 내놔라. 아니면 인정치 않겠다.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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