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타진요 사태 당시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나마 나았다. 타진요도 잘못했고 타블로도 잘못했다. 그러니까 타블로 역시 타진요가 주장하는대로 의혹들에 대해 성실히 해명하라. 당장 한 개인이 다수의 집요한 폭력에 고통받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피해자일 수 있는 타블로에게도 책임을 지우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칼로 사람을 위협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혹은 여성을 납치해서 성폭행하려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그 순간에도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립적으로 판단한다.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귀찮고 성가셔서, 혹은 오히려 자신이 해꼬지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외면하는 것이면 솔직하다. 그래서 그 중립은 누구를 위한 중립이고 무엇을 위한 중립일 것인가. 무엇보다 그런 행동이 중립이기는 한가.

중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다. 중용은 한가운데가 아니다. 중용이란 양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았더라도 칼을 손에서 놓고 위협을 그만두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다. 일단 여성을 당장의 위험에서 구했으면 거기서 더 나가지 않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거기서 실수를 저지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눈에는 딱 눈까지만, 이에는 딱 이까지만, 그마저도 지나칠지 모르니 잠시 삼가고 더 조심하자는 것이 중용의 원래 취지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비겁함을 중용이란 이름으로 치장하고는 한다.

조금이라도 선하면 선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악하면 악한 것이다. 백 가운데 하나라도 더 좋으면 좋은 것이고, 백 가운데 하나라도 더 나쁘면 나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선한 쪽으로, 더 좋은 쪽으로, 더 나은 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조금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더 좋은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어차피 오십보백보니 그냥 둘 다 나쁜 놈이다. 99가 나쁜 놈과 100이 나쁜 놈이 같아지면 결국 남는 것은 100이 나쁜 놈인 것이다. 악이라는 건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빠른 그래서 방편일 테니까. 누가 어렵고 귀찮고 더구나 느리기까지 한 선을,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그래서 옛말에도 바른 길이 한 자면 나쁜 길은 한 길이라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악이 더 빠르게 자란다는 뜻이다.

자기가 방관하고서도 어째서 세상은 더 나쁜 것으로 가득한가. 오로지 순수하게 선하고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한 주제에 어째서 세상은 악하고 불의한 이들만 이리 많은 것인가. 그래서 외면하고 그래서 방관하고 그래서 멀찍이 물러서서 손가락질한다. 자기는 책임없다. 그래서 일찌기 고염무도 말한 바 있었다.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것에는 한낱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바른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꾸짖지 않으면 결국 세상의 일은 그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책임없다. 오로지 모든 것은 저들의 책임이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그리 말씀하셨다. 어설프게 똑똑한 놈들이 세상을 망친다. 그래서 예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도 정기준의 주장에 일부 동의한 바 있었다. 차라리 아예 똑똑하면 속지 않고, 차라리 아예 어리석어도 속지 않을 텐데, 그러나 어설프게 똑똑한 놈들이 제 꾀에 속아넘어간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자기가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저런 진흙탕에 발을 딛지 않겠다고. 세상을 바꾼 것은 항상 그런 진흙탕 속에서 모든 것을 걸고 함께 뒹굴던 이들이었다. 그들조차 외면하고 똑같은 기준으로 비난하던 이들이 바로 그들 비겁한 대중들인 것이다. 내가 절대 진보는 될 수 없다 말하는 이유다. 나는 대중을 믿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이란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본성은 선할지 몰라도 잠시의 나태와 방관이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빠른 악으로 이끌리도록 만든다. 동기는 무척 선한데 그러나 결과는 항상 악이다. 악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약해서 게을러서 무엇보다 영악해서 인간은 악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세상을 바르게 바꾸는가. 어떻게 세상은 더 낫게 바뀌는가. 조금이라도 틀린 것을 모조리 싸잡아 비난하고 외면하면 세상은 달라지는가. 더 좋고 더 나쁘고를 판단하지 않고 제 성에 차지 않는다고 욕하고 돌아서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인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게 흘러온 것이 바로 이 사회고 이 나라고 바로 자신들일 테니. 과연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까. 부질없을 것이다. 때로 느끼는 뼈저린 절망이다. 희망조차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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