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19세기 정조가 죽고 바로 조선의 왕권은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는 것일까? 어려서 즉위했다고는 하지만 김조순이라는 든든한 후견인도 있고 순조 자신도 그렇게 무능하기까지 한 임금은 아니었다. 물론 왕으로서 무능하다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실제로 현실에 구현할 역량이 부족한 것을 뜻한다. 아무리 영민하고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현실로 옮기지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다른 이야기다.


아무튼 그러나 정작 진실을 이해하자면 먼저 어떻게 숙종의 재위 이후 영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그토록 완벽하게 신하들을 통제하고 제압할 수 있었는가. 단종 이후 최초라는 숙종의 정통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단종은 그러면 정통성이 부족해서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까지 당했겠는가. 바로 조선이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고 그것을 중단하기까지의 사정과도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당시 조선의 재정수입 가운데 상당부분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에서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천하에 편입되지 않은 이상 일본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도, 더구나 무역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류큐를 사실상 지배아래 두고 류큐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과 무역을 하기는 했지만 전국이 통일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더욱 커지기 시작한 일본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머지를 어디선가는 사들여야 했다.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을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자주 보내어 적극적으로 조공무역을 해왔거니와, 더구나 청이 건국되고 책문에서 제한적이지만 사무역도 허용되고 있었다. 조선의 주력수출품인 인삼과 쇠가죽 역시 일본에서 무척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이 지불한 것이 바로 은. 유황도 구리도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중국에 물품을 구입하고 결제할 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아는 바와 같이 중국이 은본위제를 채택하며 동아시아 무역의 기본결제수단은 은이 되었고, 그리고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기까지 무역에 사용된 은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나오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사인들이 일찍부터 일본을 찾았던 이유였다. 그 은이 조선으로도 흘러든 것이었다. 오사카성 여름싸움도 끝나고 일본의 정국이 안정된대다 청과의 전쟁도 끝나서 중국과의 국경도 정상을 찾아가면서 무역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딱 효종, 그리고 숙종 연간이다. 얼추 조선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러면 19세기 조선의 왕권이 추락할 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무엇보다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은으로 결제해야 하는데 일찍부터 은광을 개발하여 채굴해 왔던 탓에 일본의 은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미 은의 부족으로 결제에 사용한 은의 품질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제수단의 부족으로 인해 더이상 조선으로부터 물품을 사들이지 못하며 일본 내부에서 대체품을 생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삼이었다. 조선의 인삼과는 효능이 전혀 달랐음에도 일본에서도 인삼의 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일본에 대한 가장 주된 수출품은 면화였었다. 팩추얼드라마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면화재배장면을 묘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선중기에는 일본에 수출한다고 너도나도 면직물염색에 뛰어드느라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워낙 조선의 재정 가운데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아무리 전세를 많이 걷어봐야 1할도 안되는 세율로 무려 생산의 절반을 지대로 거둬가는 사대부들을 경제력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역에 대한 세금은 공식적으로 오로지 조정만이 거둘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전세의 비중이 커지면 경제력에서 조정과 왕실이 사대부를 압도하기란 어려워진다. 반대로 전세보다 무역이나 상거래로 인한 세수의 비중이 높아진다면 조정과 왕실의 재정은 사대부의 그것을 앞설 수 있다. 딱 그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에서 조선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는 그로 인한 세금만으로 조선조정은 어느때보다 풍족한 안정적인 재정을 꾸릴 수 있었고 이는 곧 조정과 왕실의 힘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무역과 상거래가 위축되고 전세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재정은 악화되며 조정과 왕실의 권위는 그만큼 추락하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모든 힘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치권력이라는 것도 경제력과 비례하기 쉬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이 그저 백성들만을 위해 그리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그런 이유로 조선에서도 중상주의자와 중농주의자 사이에 서로 추구하는 정치지향이나 철학이 서로 달랐었다. 중농주의자들이야 당연히 향촌경제를 장악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자치에 더 무게를 두었었다. 반면 주로 조정이 있는 한양에 거주하고 있던 중상주의자들은 조정과 전제적인 군주가 주도하는 개혁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같은 경향은 갑신정변까지 조선내 개화파의 주된 입장이 된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은 지주의 것이지 나라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인이 장사를 해서 거두는 이익은 오로지 나라만이 거둘 수 있다. 부국강병은 상업과 무역에서 비로소 나온다.


그저 드라마에서처럼 국왕, 혹은 세자가 권신과 말싸움 몇 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많은 궁인들에게 녹봉도 주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추가로 도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대신들에게도 충분한 녹봉이 지급될 수 있어야 한다. 병사들을 굶기고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먹이고 나야 충성심도 기대할 수 있다. 조선의 재정은 그래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왕이 힘을 쓸 수 없다.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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