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이릉에서 육손에게 크게 패한 것이 서기 221년,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상심하여 백제성에 머물던 유비가 병을 잃고 사망한 뒤 불과 4년 만에 제갈량은 조위를 상대로 북벌을 시작한다. 이릉에서 상당한 인적자원을 잃고 유비라는 구심점까지 사라진 상태에서 제갈량은 불과 5년도 지나기 전에 조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여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조위를 상대로 무려 7년 동안 주도권을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반전이었다.


사실 유비가 죽는 순간 촉한의 운명은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촉한은 오로지 유비가 있었기에 세워질 수 있었던 나라였다. 고작 익주 하나였다. 변방이었고 인구도 물자도 모두 터무니없이 적었다. 혼자서 세력을 이루어 살아남기란 이미 조조가 한의 천하 대부분을 발아래 두고 있던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처음 장송도 익주 혼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기보다 제발로 조조의 품으로 들어가 그 보호를 받고자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비의 존재가 그같은 장송의 결심마저 바뀌게 만들었다. 유비라면 촉이라는 변방을 기반으로 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대의명분이었다. 당장 유비 자신이 황제의 먼 친척이었고, 그동안 끊임없이 무모할 정도로 조조에 맞서버 부딪혀 오고 있었다. 원소마저 사라진 당시의 천하에서 패자가 되어 황제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와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비 한 사람 뿐이었다. 아직 한의 천하를 기억하고 조조에 반대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유비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당장은 조조의 지배 아래 있지만 아직 한의 천하를 잊지 못하고 있기에 기회만 되면 유비를 따라나설 이들이 천하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관우가 조인을 번성으로 몰아넣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을 때도 그래서 조조의 천하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바로 그 유비가 있기 때문에 촉은 반조조의 중심인 것이고, 바로 그 유비가 있었기 때문에 한이 망하고 한을 이은 또다른 한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비가 죽었는데 촉은 전처럼 하나의 나라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전례를 보더라도 유비라고 하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공백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분열이 뒤따랐다. 권력층이 분열하고, 혹은 통제를 잃은 관료층이 부정과 부패로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가만 내버려두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촉한은 망해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서촉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가 죽고 촉이 가장 큰 위기에 놓였을 때 오히려 조위가 그를 방치했던 이유였다. 굳이 자신들이 먼저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당장 말해야 할 나라에서 어느날 군대가 출병하더니 옹양주 일대를 한순간에 모두 차지하고 말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로 그것이 제갈량이 대단한 점이다. 선주 유비의 고명을 받으며 유비가 가진 명분까지 모두 계승했다. 이엄의 숙청은 자칫 분열될 수 있는 촉한의 내부를 제갈량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과정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주군 유비를 대신하는 존재가 된다. 그것을 모두에게 납득시킨다. 사실 제갈량이 촉의 승상이 되어 이룬 모든 업적보다 이것이 가장 대단했다. 오로지 유비에 의해 유비로 인해 세워진 촉이었기에 유비가 죽은 지금도 유비가 필요했다. 제갈량 자신이 유비가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다. 이후는 그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내정을 안정시키고, 그리고 군비를 키운다. 불과 4년이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벌에 나서게 된 것이. 그러고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사적으로도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내정도 전혀 피폐해지지 않았다. 과로사했다는 말이 허투루들리지 않는 이유다.


군재가 부족하다지만 그것은 재상으로서의 중국역사상 한손에 꼽히는 능력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지 당시로 한정했을 때결코 정확한 평가라 볼 수 없었다. 당장 당시 조위의 최고 명장이었던 장합이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조진을 이은 도독 사마의가 회전에서 제갈량에게 패한 뒤 다시는 모험을 않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지휘관인 한신이나 백기 같은 인물들도 그토록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에서 안정된 적을 상대로 그같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었다. 모험을 시도하기에는 촉과 위의 현실적인 차이가 너무 절대적이었다.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위를 약화시켜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나 역시 만약 유비가 살아서 제갈량 대신 북벌에 나섰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재상으로서의 역량은 과연 소하와 장량에 비견할 수 있고, 군지휘관으로서도 한신과 비교해 그의 상대는 항우가 아닌 사마의였고 조위였다. 거의 유비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이 빈손에서 시작했다. 마이너스였다. 유비에게 오로지 황실종친이라는 명분만이 있었듯이 제갈량에게도 유비의 고명대신이라는 명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초기족건을 충실히 활용하여 역사를 움직인 것은 개인의 역량이었다. 대단하다 여기는 부분이다. 어쩌면 소설보다도 실제의 제갈량은 더 대단하다. 바람을 부르지도 미래를 내다보지도 못해도 역사를 바꾼다. 심지어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장완과 비의, 그리고 강유까지 그가 남긴 인재들이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촉을 지탱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남기듯 제갈량은 그들을 남겼다. 삼국지 후반의 주인공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사를 이유로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유명한 이들은 다시 평가받고, 상대적으로 무명인 이들에 대해 다시 평가된다. 정사에 비해 연의의 제갈량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과장된 것이지 모두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삼국지연의가 있기 전에도 제갈량은 명재상의 상징이었다. 당징 손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서진에서부터 제갈량의 평가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갈량과 같은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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