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내가 민주당을 탈당한 것도 선거가 끝나고 180석의 압승에도 유시민을 저격하며 책임을 물으려는 모습에 환멸을 느껴서였었다. 그동안 유시민이 민주당을 위해 한 일이 얼마인데. 선거기간동안 민주당에 한 표라도 더 가도록 노력한 것이 또 얼마였었는데. 그러나 당적도 없고 무리에 속하지도 않으니 마음놓고 저격하며 떨어진 놈은 떨어진 놈대로, 붙은 놈은 붙은 놈대로, 그러니까 200석도 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뭔 개소리인가.

 

인지상정이라는 것일 게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물론 스스로 성추행 당했다고 고소한 사람이 있는데 마냥 외면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그런데 고소고발했다고 피해자라고 연민을 가지고 연대하려 한다면 가세연과도 연대해야 할 것이다. 법세연은 어떨까? 그렇게 고소고발 남발하고 있는데. 그냥 고소인이다. 고발인이고. 나름대로 고통받고 억울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풀고자 경찰에 고소까지 했을 텐데 그것까지 무어라 하는 것도 사실 인지상정에 벗어나는 일이기는 하다.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원통하다고 고소한 사람을 무작정 비난할 일도 아니고, 고소당했다고 바로 가해자로 여길 일도 아니다. 하물며 사람이 죽었는데.

 

성추행의 진실의 사람의 목숨보다 무겁지는 않다. 더구나 평생을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온 인권변호사의 삶의 궤적보다 더 가치있지도 않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심상정이 박원순에게 돈 빌려줬다 떼인 적 있거나, 아니면 돈 빌렸다 갚기 싫은데 억지로 갚은 적이 있다. 최소한의 신뢰라도 있었다면, 동지적인 연대라는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역시 당연한 사람의 마음으로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해 한 번은 더 믿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설마 그 사람이 그랬을까. 아무리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했었겠는가. 지금 대부분 추모하는 주변사람들이나 전혀 상관없는 시민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었을 터다. 고소인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박원순이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심상정은 그렇게 쉽게 바로 박원순을 가해자로 단정지은 것일까? 고소한 사람이 피해를 주장해서? 그 사람을 더 신뢰할만한 무언가가 심상정에게는 있었던 것일까?

 

정의당의 공식논평에도 있었다. 아직 사실관계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고소했다고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소당했다고 가해자라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다. 원래 박원순에게 원한이 있었거나, 아니면 남성이기에 그저 고소당했다는 사실만으로 가해자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데 박원순의 그동안의 삶을 보았을 때 그 정도 원한을 맺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박원순을 그냥 남성으로만 여기는 것도 그다지 타당하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었는가.

 

그래서 한 편으로 다행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죽음으로 언론의 실체를 까발렸고, 박원순 시장은 죽음으로 여성주의의 진실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지금 여성주의가 누구와 함께 어울리고 있는가. 지금 여성주의자들의 행동이 가세연 등 극우유튜버와 무엇이 다른 게 있던가. 단지 고소당했다는 이유로, 더구나 고작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고 한 인간을 단정짓고 조롱하고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류호정으로는 부족했는데 갈수록 더 말들이 심해지고 있는 중이다. 축배를 들고 환호를 한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80년대 90년대 선배들은 참 쓸데없는 짓 한 것이라고. 민주화고 인권운동이고 다 쓸데없다. 특히 남성이 하는 여성주의 운동이란 것은. 여성주의자들에게 남성은 절대 동지일 수 없다. 남성이란 억압하고 타도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는다. 성재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박원순은 어째서?

 

정의당에서 당원들의 집단탈당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마 나와 비슷한 것을 본 모양이다. 안희정 전지사와 관련해서 이야기한 바 있었다. 이념에 매몰되면 사람이 사라진다. 그래서 박원순 시장을 일방적으로 가해자로 낙인찍는 행위가 피해자라 주장하는 고소인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죽은 박원순 시장을 모욕하는 순간 고소인에 대한 굳이 없어도 되었을 불편한 감정까지 생겨나고 마는 것이다. 그 고소인으로 인해 모든 삶과 죽음까지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박원순의 삶이 어떠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다.

 

원래 사람은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이다. 유교의 이기론에 따르면 리의 이성은 기의 감정을 움직이는 원천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를 감정으로 드러낸다. 이성으로 사고하고 그를 감정으로 표현한다. 민주주의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에 분노한다. 세상은 공정하고 평등해야 한다. 그래서 불공정과 불평등에 분노하며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고 지켜져야 하는 근본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드러낸다. 정의당 정치인들이 박원순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감정의 근원은 무엇일까.

 

사람이 감정적으로 올바른 대응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고 그 대상이 전두환이었어도 사람들이 이랬겠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박원순이란 인간을, 그의 삶을, 그 궤적과 업적들을, 그 동지적 관계를,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기본적인 판단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 감정적으로도 전혀 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고소인을 피해자로 단정짓는 것도, 피고소인을 가해자로 단정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심상정이 박원순 시장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고. 그리고 그것을 본능으로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꽤나 심각해질지도 모르겠다. 박원순 시장을 모르는 이들도 아닌 것이다. 몰라서도 안되는 것이다. 아니 설사 모르더라도 모르는 만큼 삼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머리만 너무 앞선다. 그런데 원래 진보가 그랬다. 여성주의자들이 그랬었다. 그것을 이성이고 논리라 여겼을 지 모르지만 섣부르고 일방적인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운동할 때 근육의 움직임을 살피듯 그래서 어떤 주장을 할 때도 자신의 감정의 움직임을 살펴야 한다. 감정으로 글을 쓸 때는 굳이 이성적인 척 논리적인 척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정은 단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부끄러운 게 아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다만 그 감정이 올바로 작용하고 드러나는가를 이성에 맡겨 판단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정의당 국회의원들의 박원순 시장에 대한 무례와 모욕과 혐오와 증오가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었는가.

 

다만 그렇다고 기회가 온 양 과거의 사건들까지 끄집어내어 여성주의자로서 박원순 시장의 삶까지 모욕하려는 반여성주의자들과도 말을 섞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여러 논쟁에서 여성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던 것도 그들 반여성주의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과 논리에 혐오와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니까. 고작 고소장이 접수되었을 뿐인 사건과 복수의 증언으로 교차검증된 이전의 사건들이 같은가. 재판을 통해 판결까지 내려진 경우와 같은가. 안희정은 확실히 유죄였다. 내가 아는 바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김지은씨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는 성폭행이라는 인식 없이 그런 행동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그게 바로 위계에 의한 성폭행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의 강요된 성행위인 것이다. 그러면 그건 성폭행이 아닌 것인가.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박원순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설사 사실이더라도 전기의 말미에 이런 추문도 있었다 정도를 덧붙일 수 있는 삶을 살아 온 사람이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며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정의당의 젊은 정치인들이. 그리고 정의당 당원들은 그런 자신의 당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고. 감정이 어떠할까. 민주당을 탈당한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는 바 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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