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막막한 바다 한가운데 외딴 무인도에서 아예 구조될 희망마저 포기한 채 살아가는 조난자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섬에서 나가기 위해 이런 궁리도 해보고 저런 시도도 해보면서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들이 보낸 신호를 알아보고 구해주지 않을까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시도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며 어느새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체념은 섬에서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 외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섬에서 나갈 수 있다."

"아직 포기해서는 안된다. 방법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자.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과연 사람들은 그런 누군가의 주장에 대해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아니면 또다른 절망으로 여기고 그를 거부하려 할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희망이란 단지 절망의 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좌절로 그리고 끝내는 체념으로 바뀌고 만다. 차라리 포기하면 편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않고 포기한 채 있으면 더이상 절망도 좌절도 없을 것이다. 매번 절망하고 좌절할 때마다 겪었던 마음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에게 다시 희망을 가지라 말한다. 다시 그 끔찍한 절망과 좌절을 겪으라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미 포기해 버린 자신들을 다그치며 몰아세우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혹시라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자신들을 비웃고 비난하는 것은 아닐까.

 

부처가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지옥으로 간다면 지옥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은 그저 기쁘게 반기기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예수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내려오면 사람들을 기쁘게 그를 맞아들일 것인가. 이미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만 남았는데, 아니 벌써 그 절망에 익숙해져 있는데 새롭게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더 의심하고 더 분노하며 더 반발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런 희망이 자신들을 더 절망케 하고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차라리 절망인 채로인 것이 좋다. 좌절한 채 체념한 상태인 것이 좋다. 그래서 차라리 그리 말해주는 사람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지옥이고 어떻게 해도 나아질 리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세상에 적응해가며 살자."

 

차라리 이것이 그들에게는 희망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러므로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그런 위악스런 주장들이야 말로 자신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진실하게 들려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희망은 고통이다. 희망을 가졌기에 그로 인한 절망은 더욱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예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 한다. 어떤 기대도 가지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더 편해지고자 한다. 그런데 왜 자꾸 자신들을 들쑤시려 하는가.

 

역설적으로 여전히 희망이라는 것에 기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기에 희망 자체를 거부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더욱 원망스럽고 밉기만 하다. 그를 좌절시키고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이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어째서 가난한 이들은, 혹은 현실에 좌절한 젊은 층에서 그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에 더 분노하며 그들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는가. 차라리 솔직하게 현실의 악을 보여주는 이들이 위선적이지는 않아서 더 좋다. 변화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들이야 말로 자신들을 더 고통으로 몰아넜는 위선자며 악인 것이다. 문득 조국 장관과 그 가족에 대한 끝없는 증오와 저주를 쏟아내는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하고 끝내 체념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소외된 계층에서 진보적 가치를 거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실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절망에 익숙하다. 좌절과 체념에 길들여져 있다. 희망이란 오히려 더 큰 고통이고 공포일 뿐이다. 차라리 이대로가 좋다. 그냥 이대로 익숙한 대로가 더 낫다. 그래서 변화를 이야기하는 진보보다는 그냥 이대로의 삶을 이야기하는 보수가 더 친숙하다. 어차피 세상은 지옥이고 자신의 삶이란 고통일 뿐이다. 이대로 익숙해 있다면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 자유의지주의도 아닌 그냥 체념이 아니었을까.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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