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해 왔었다. 하나는 국가가 베푸는 시혜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다. 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베푸는 혜택으로 여겨졌었고, 반대편에서 주로 진보적인 입장에서 국민의 당연한 권리로써 국가가 국민에 대해 가지는 의무로 여겨졌었다. 따라서 복지로 인한 재정지출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국민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출이라 여기는 인식과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할 재정이라는 인식이 서로 대립하며 공존해 왔었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상황에 대한 재정지원정책에 대한 논란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재난상황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은 시혜인가? 아니면 권리인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말 그대로 천문학적이다. 대부분 기업이나 자영업자, 농어민들이 이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실시간으로 입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피해의 보전은 국가의 의무인가? 아니면 국가의 시혜인가? 그래서 시험으로 관료를 뽑는 제도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으면 승리자다. 성공한 것이다. 당연히 시헙에 불합격했거나 아예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면 패배한 것이고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국민은 개돼지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기들은 시험에 합격해서 고위공무원이 되었으니 승자고 성공한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국민을 보게 된다. 저 무지렁이들을 위해 귀한 국가의 재정을 축내야 할 것인가. 내 주머니의 돈이 되고 무지렁이 국민을 위한 낭비로 인식한다. 차라리 그 돈을 아껴서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어째서 문재인 대통령은 선별적지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초부터 기재부에 주문해 온 내용 가운데 하나다. 한 번은 직접 거론하며 묻기까지 했었다. 국가부채비율 40%는 어떻게 산출된 것인가? 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려 해도 기재부가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기재부가 돈줄을 쥐고 움직이지 않으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기재부가 움직이는 범위 안에서 재정을 쓰려 하면 전국민에게 만족할 만큼 지원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기재부가 필요한 만큼 재정을 쓸 수 있으면 전국민에게 충분한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요한 곳에 아껴가며 쓰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 개인에게 40만원 씩 지급하는 것과 어려운 자영업자들에게 300만원 씩 지급하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더 시급한가. 

 

김상조 수석이 최배근 교수더로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질책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지급을 하려면 그만큼 충분한 국채를 발행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기재부의 자발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부란 그렇게 돌아가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재명이 홍남기와 기재부를 공격하고, 지지자들이 그런 이재명에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선별적 지급이라 할지라도 그 규모가 현실적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예 코로나19로 문을 닫아야 했던 자영업자들에게 손실금액 상당부분을 보전할 정도로 지급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시름을 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다. 선별적 지급이라기에도 지원액수가 너무 터무니없이 적고, 일괄지급에 비해서 효과도 크지 않은 상태다. 도대체 무얼 위한 선별적 지급인 것이다.

 

대통령의 명령에도 꿈쩍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기재부와 그 수장인 홍남기에 대해 지지자들이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코로나19 이전부터도 그래 왔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당시부터 소득주도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재정확대정책에 대해서 기재부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저지해 왔었다. 김동연이 어떻게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좌초시켰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홍남기와 기재부를 이대로 가만 두고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런 홍남기의 기재부와 보조를 맞추려는 이낙연의 개혁의지를 과연 낙관하며 지켜봐도 괜찮을 것인가. 거기서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의 선별지급을 둘러싼 갈등이 사면론 이후 더욱 크게 불거지는 것은.

 

과연 국가적 재난상황에서 국가가 재정을 투입해 국민의 경제적 손실을 지원하는 것이 특혜인가? 권리인가? 국민은 자신의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을 국가로부터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민주당 안에서도 입장이 서로 갈릴 것이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입장을 서로 구분해 이야기한 것이다. 민주당 안에는 상당히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주류정당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낙연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이재명의 주장은 어떤 장점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차라리 사면론보다 생산적인 갈등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가의 재정정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인가. 다만 문제라면 이재명의 경우는 국가의 재정을 마치 자기 주머니 돈처럼 여기는 듯한 인상도 아주 없지 않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의지가 그렇다고 기재부가 항상 따라야 한다면 공무원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무튼 이낙연으로서 스스로 빠져든 수렁이랄 수 있는 사면론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지금의 논쟁을 키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홍남기와 진짜 서로 소통하고 있다면 더 과감하게 선별지급을 하되 그 액수와 범위를 넓혀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도 한 번 해 봄 직하다. 더 많은 대상에게 더 파격적인 금액을 책정하여 지급한다. 진짜 위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큼을 재정에서 지급한다. 이재명과 차별화되면서 자신의 선명성과 강점을 드러낸다. 마침 대통령도 선별적지급을 주장하고 있기에 그 후광을 입을 수도 있다. 정부와 여당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 내가 이낙연이고 참모라면 적극 추진할 것이다. 원래 의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워낙 이낙연이란 인물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보니.

 

과연 국민을 위해 베푸는 국가의 시혜인가, 아니면 국민의 당연한 권리인가. 국가의 재정이 따로 있고 국민에게 베푸는 지원이 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위해 국가의 재정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더라도 결국 더 어려운 국민을 위해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는 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너무나 당연한 당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경제활동의 보장은 국가의 책임인가? 아니면 시혜인가? 더 적극적인 이낙연과 민주당의 정책적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의 고민도 지금 매우 깊을 것이다. 홍남기와 기재부는 일단 때려잡고. 국가의 재정이 늬들 주머닛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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