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이영훈이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로써 내세운 근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시대 지주들의 도덕적 지배와 일제강점기 이후의 지주의 사유권 강화의 비교였었다. 얼핏 보기에 조선후기 소작농과 정서적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도덕적 지배의 형태가 더 옳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주의 배타적 권리를 강화하는 쪽이 근대적으로 더 발전된 형태란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이 프랑스혁명 이전의 농민들과 도덕적 지배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봉건귀족들과 산업혁명 이전 냉혹하게 농민들을 쫓아내며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했던 영국 지주들의 사례였다. 대대로 농사지으며 살아왔던 농지로부터 내쫓기게 된 농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사유재산과 시민의 권리야 말로 근대의 시작이란 것이다.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조선시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직 여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이란 어떤 존재이며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이전까지 교육이란 - 즉 사회화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의 출신이나 혹은 남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의 실제 사회적 지위가 높았느냐면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이란 남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더욱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킨 결과가 조선시대 부덕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명하고 어진 여성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라서 오히려 근대로 올수록 여성의 지위는 더 낮아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여성을 대하는 예의는 더 정교해지고 더 치밀해졌지만 그만큼 여성에 대한 억압도 강해졌다. 그래도 전에는 출신이나 배우자의 신분 등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비례해서 상승하여 자유롭게 권한을 휘두르는 것도 가능했지만 어느새 여성이라는 자체가 제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여성주의라는 것도 생겨났다. 원래 여성주의란 남성으로부터 독립한 여성의 자존이었지 남성에 기대는 여성의 신분상승이 아니었다. 그런데 닮지 않았는가. 그래서 기생페미니즘이라 부르는 것이다. 딱 지금의 여성주의는 남성에 기대는 전근대의 신분상승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체계는 정교해지고 따라서 그 안에 구분과 구별 역시 치밀해지게 된다. 조선전기에 신분이란 양인과 천인 둘 뿐이었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양반조차 벌열과 향반과 잔반으로 나뉠 정도로 그 구분이 세분화된다. 양반의 신분에 대한 의식이 강화될수록 그 구분은 명확해지고 천인과의 구별은 더 구체화된다. 유럽에서도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고 시민이라고 다 같은 시민이 아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대가 발전할수록 그 구분은 명확해지고 그 경계는 강고해졌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도덕적인 지배로 묶여 있던 시대에는 서로에 대한 온정도 기대해 볼 수 있었지만 서로 자기 영역이 분명해지며 인정에 기댈 수 없게 되었을 때 현재의 구조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거기서 사회혁명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그 모순이 심화되고 난 뒤에야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전제를 처음부터 정면으로 부정하며 나선 것이 바로 레닌이었고 마오쩌둥이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기 전에도 선제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 불완전한 혁명은 자본독점적인 독재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모순을 더욱 심화랄 필요가 있다. 내 주장이 아니라 10여 전 전 당시 어울리던 지금은 녹색당을 지지하는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자칭 진보가 일제강점기를 긍정하고 박정희를 긍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진화론을 이 땅에 적용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반도의 사회적 진화의 결과 모순이 극심해지면 비로소 아래위가 뒤집히고 뒤섞이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파업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위원장을 지명수배해서 잡아가두던 보수정권보다 마음대로 파업할 수 있게 해주는 민주정부를 더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현정부가 들어서면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쌍용자동차 노조위원장부터 투쟁하기 더 힘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때가 기사쓰기 더 좋았다는 것이 한겨레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권력과 자본의 억압이 노골화되고 모순이 첨예화될수록 자신들이 주장하기 더 좋은데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아쉬우나마 타협과 진보가 가능하기에 너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차라리 수구가 정권을 잡는 쪽이 자기들에게 더 유리하다.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진중권은 전향한 적이 없다. 서민 역시 전향한 적이 없다. 홍세화와 최장집, 강준만, 김규항 무리들은 여전히 한결같다. 정의당은 어떤가. 박용진이 소득세 법인세 감면을 주장하는 것을 보며 새삼 떠오른 생각이다. 박용진의 뿌리가 어디인가. 바로 어제까지 삼성을 못잡아먹어 발악하던 박용진이 어째서 저런 주장들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인가. 어째서 저들은 차라리 수구에 더 온정적이고 친화적인 것일까.

 

혁명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세종이나 성종 같은 어질고 현명한 군주들인 것이다. 차라리 연산군 같은 폭군에 암군이면 혁명을 일으키기 쉽다. 더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어야 자칭 진보가 자리잡기 쉽다. 박주민처럼 애매하게 월세를 올려 받을 것이 아니라 주호영처럼 화끈하게 올려받아야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세훈을 지지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오세훈이 용산참사를 일으켜 주어야 자기들에게 설 자리가 생긴다.

 

그래서 손잡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고 노동자를 탄압해야지만 노동자의 대변자로서 자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진다.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노골화되어야지만 그 대변자로서 자신들에 대한 지지도 높아진다. 한반도에 긴장이 높아져야 평화를 향한 자신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원자력발전소를 지금보다 몇 배 더 짓고 문제도 터져야지만 탈원전이라는 자신들의 아젠다가 인정받을 수 있다. 김학의가 활개쳐야 성인지감수성이 정당성을 갖는 것과 같은 논리인 것이다.

 

수구야 말로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정당한 지배자인 이유인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발전론에 따르면 혁명을 위해서라도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와 자본의 독점과 억압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이야 말로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의 진보라 해봐야 원래 진보의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비주류들인 것이다. 진짜는 자신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타도해야 할 수구인 것이다. 그래서 참칭이다. 옛날 기억들을 떠올린다. 역시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더 나았다. 노동자를 위해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도, 소수자들을 위해서도, 진보와 정의를 위해서도. 문재인을 혐오하는 이유다. 변한 게 없다. 그야말로 화석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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