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부산에 가야 한다. 그런데 바로 앞에 히틀러가 모는 자동차와 예수가 타고 있는 자전거가 보인다. 부산에 급한 일이 있어 가야 하는데 과연 히틀러와 예수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히틀러보다는 예수가 낫다는 사람은 아직 여유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오늘 안에 부산에 도착해야 하지만 굳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면 히틀러가 아닌 예수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진짜 급해서 오늘 안에 부산에 가야 한다면 히틀러나 예수보다는 자동차인가 자전거인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히틀러가 모는 차를 타더라도 어떻게든 오늘 안에 부산에 도착해야만 하기에 그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동차다 더 급하기 때문이다.

 

내가 흔히 쓰는 비유 가운데 하나다. 사장이 여러 직원들을 고용해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선택지가 주어진다. 법을 지키면서 양심대로 사업할 경우 매출이 줄어들 것이므로 직원 여럿을 잘라야 한다. 들키지 않는 범위에서 법을 어기고 양심을 속일 수 있다면 직원들에게 보너스도 얼마간 더 챙겨줄 수 있다. 직원들 입장에서 어떤 사장이 더 좋은 사장인가? 그야말로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처럼 너무도 인격적으로 고결해서 아주 사소한 잘못도 찾아볼 수 없는 도덕적인 인물인가, 아니면 차라리 인간은 개차반에 쓰레기라도 사업을 잘 운영해서 직원들에게 필요한 급여와 복지를 제대로 챙겨줄 수 있는 인물인가?

 

사업체가 아닌 가정으로 넘어가 보자. 사흘을 굶었다. 가족들이 당장에라도 죽겠다고 울부짖고 있다. 그렇지만 차마 법을 어기고 양심을 속일 수 없기에 그냥 두고만 보는 가장과 차라리 나가서 도둑질이라도 하려는 가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가장일 것인가? 물론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그럴 처지가 못되는 경우에 대한 것이다. IMF 당시 하던 사업이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을 상황이 되자 그래도 가족이 헤어질 수는 없다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노숙자생활을 하던 가장이 있었다. 차라리 노숙자로 길거리에서 먹고 자더라도 부모로서 아이를 버릴 수는 없다. 나몰라라 시설에 맡길 수는 없다. 그 또한 가장으로서 그의 절박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뇌물을 밝히고 허구헌날 계집질에 하급자에게 폭력을 일삼지만 지략 만큼은 이순신인 인물과 너무나 청렴결백하고 인격적으로도 고결해서 모두의 존경을 받지만 전술능력만큼은 원균인 인물이 있다면 누구에게 수군을 맡길 것인가. 그것도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수군통제사를 임명해야 하는데 인간이 쓰레기인 뛰어난 전술가와 인격적으로 훌륭한 멍청이가 있다면 누구에게 지휘권을 맡길 것인가. 그 연장에서 단순히 지키는 것만 생각하는 지휘관과 역습까지 생각하는 지휘관이 있다면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선택할 인물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더 이상 무리하게 전쟁을 키우기보다 그저 적당히 지키고 나서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경우와 반대로 이번 기회에 아예 다시는 덤비지 못하도록 큰 피해를 강요하거나 아니면 복속까지 염두에 두는 경우의 선택이 서로 달라지는 것이다.

 

도덕성이란 여러 조건이 갖춰졌을 경우 선택지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생물로써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도 하기에 더욱 인간에게 완전한 도덕성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소한 도덕적인 흠결이나 자신의 선과 정의의 기준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찾았다고 실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너무나 성급하고 심지어 어리석기까지 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불완전함 가운데 어디까지 자신을 위해 허용하고 양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말하기 좋아는 자칭 중도들이 흔히 떠드는 말이 하나 있을 것이다. 정치란 도구다. 정치인이란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 도구를 어디에 쓸 것인가. 그 수단을 어떻게 쓸 것인가. 도덕적이라고 드라이버로 철사를 휘는데 쓸 것인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구멍을 뚫는데 드릴이 아닌 펜치로 대신해 쓸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정치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 내가 정치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나는 정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이재명이 아니라 이낙연이었어도 내 월급 올려주고 일하는 시간 줄여주고 일하는 환경을 더 낫게 해준다면 그를 지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데 더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된다면 이낙연이 아닌 윤석열이고 한동훈이라 해도 나는 기꺼이 지지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한 무엇이 아닌 나에게 실제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마음놓고 풍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누가 되었든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도덕적인 흠결이 있다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적당히 부정을 저질러도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된다면 그 또한 양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부패하고 범법을 저질렀어도 결과적으로 국가와 사회 모두에 이익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용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례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 개인적으로 챙긴 것보다 공적으로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그래서 양해하고 용인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정당하다. 과연 도덕적으로 완전하기 위해서 그같은 이익들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국가와 사회, 나아가 개인들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인가.

 

그러고보면 프레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같은 도덕성을 검증할 주체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한 마디로 언론이 자기들 영향력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정치인만이 진정 지지할 가치가 있는 정치인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면 가치가 없는 정치인이다. 거기에는 개인이 정치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지향이나 현실의 정책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이 그랬었다. 실제 현실에서 영향을 끼칠 정책적인 대안이나 실제 실력과는 상관없는 이미지에 모든 언론들이 올인하고 있었다.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한겨레조차 진보적인 이념성보다는 개인의 도덕성을 명분삼아 윤석열 지지에 나서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렇게 윤석열을 지지한 결과가 무엇인가. 다수 임금노동자와 임금소득으로 생활해야 하는 그 가족들의 현실이 그 결과를 말해준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자신을 위해서도 더 시급할 것인가. 그래서 당시 윤석열의 이미지였던 공정과 상식이 얼마나 현실에서 개인들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었는가. 더구나 진보를 자처하던 2찍 진보들이라면.

 

그래서 참 한가하다 여기게 되는 것이다. 참 여유롭구나 부러워하면서도 한심하다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둘 다 완전무결하지 못하니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다.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다. 두 정당 모두 지향하는 바가 너무 다른데 번갈아 지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여기기도 한다. 남의 일인 때문이다. 정치란 남의 일이라 여기는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차냐 자전거냐보다 히틀러인가 예수인가만 따지게 된다. 전쟁이 급박한데 지휘관의 인성이나 따지고 있는 그 한가로움이 중도란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고 바라는 정치적인 목표나 지향이란 무엇인가. 아마 대답을 못할 것이다. 아예 생각한 적이 없을 테니.

 

이명박 때도 그래서 들었었다. 일단 아무나 지지하고서 반대하면 된다. 지지해서 당선시킨 다음 요구하고 반대하면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래 주장하던 것부터 다르다니까. 평소 주장하던 내용들부터 자신의 요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지하고서 요구하고 반대하면 그에 따라줄 것이다. 아니면 지지를 철회하면 그만이다. 이미 당선되었는데? 

 

아무튼 언론들의 장난질에 제대로 놀아나는 꼬라지들이라는 것이다. 언론과 더구나 수사와 판결을 독점하는 사법카르텔이 이 사회의 정치마저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판단을 맡긴 뒤 그것으로 자위하려 하고 있다. 나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도 고결하다. 현실이 아니다. 정치가 왜곡되는 이유다. 거대서사는 디테일을 속인다.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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