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가 싹을 틔운 토양 자체는 서로 다르지 않았었다. 여전한 신분제와 그보다 지독하고 악랄한 계급적 질서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그를 해소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둘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차이라면 사회주의는 그러한 구조의 근본적인 해결을, 그리고 전체주의는 감정적인 해소를 추구한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조선의 신분제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신분제 자체를 타파할 것이냐 그런 모순을 야기한 소수를 응징하고 끝낼 것이냐 하는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에 의해 모든 사회질서가 뒤집히면 그나마 알량하게 바라고 기대던 희망과 기대마저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반상제가 남아 있어야 나도 양반이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반상제가 사라지면 역시 나도 양반이 될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가 가지는 영광과 명예를 함께 누릴 일도 없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당시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사회주의자들마저 국가라는 이름에 호응해서 전장으로 달려갔던 이유였다. 국가가 유지되고 사회가 유지되어야 그나마 그동안 누리던 것도 누리고 꾸었던 꿈들도 계속해서 꿀 수 있다. 어쨌거나 자신도 대영제국의, 대독일제국의, 대프랑스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싶다. 그래서 아예 사회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사회주의에 비해 전체주의는 오히려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만 배제하려는 시도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외국인과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들이 선택된 것이었다.

 

사회를 아예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더라도 저들만 배제한다면 내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사회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저들의 존재가 나쁜 것이다. 저들의 존재가 남아 있는 한 여전히 자신들의 현실은 나쁜 채로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라도 더 강한 국가와 권력을 중심으로 단합해야만 한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많은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체주의를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전체주의를 통해 소수의 희생양만 던져주면 더이상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권력과 결탁해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도 히틀러의 가장 큰 후원자는 지방의 지주들인 융커들과 도시의 부르주아들이었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과 교황청이 그의 집권을 지지한 바 있었는데 또한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니까 기존의 사회구조는 유지하면서 단지 불만 가득한 대중을 그 증오와 혐오의 대상을 배제할 목적으로 집단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누리던 알량한 자존감과 영광을 위해서라도 대중은 국가에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너 자신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보다 구조적인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더 낮은 임금과 그런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랜 시간을 힘들게 일해야 하는 현실과 그러다가 사고를 당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현실이 너무 힘들고 버겁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 고용도 불안하고, 당장 내년에 어디서 뭘 하며 살아야 할 지 확신도 없다. 지금 무엇을 해야 내 삶이 나아질 것인지 기대조차 갖기 힘들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니 여성이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가 문제다. 중국인이 문제다. 북한이 문제다. 말한 것처럼 회사에서 하는 짓거리에 불만이 그리들 많으면서 여가부 해체한다니 그쪽에 투표한 인간들이 그리 많더라는 것이다. 월급 적다, 사람이 너무 적어 일하는 시간도 길고 더 힘들기도 하다. 심지어 기간제는 언제 그만두게 될지 매일매일이 불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가부가 더 문제고 중국과 북한이 더 문제이기에 최저임금도 낮추고 일하는 시간도 늘리고 고용도 더 악화시켜야 한다.

 

이른바 인국공논란도 출발을 같을 터였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취직해서 일을 하는데 고용도 불안한 계약직보다는 정년까지 보장되는 무기직이 더 낫지 않겠는가. 급여가 더 오르지 않더라도 고용의 안정성이나 더 나은 근무환경을 위해서도 정규직으로 고용해서 일하게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자신 또한 노동자이니 그에 공감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기대는 자신보다 못한 저학력자에 대한 2030 스스로의 혐오와 경멸에 의해 오히려 역효과를 보고 말았다. 저런 놈들이 정규직이 되면 오히려 나 자신의 삶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자격도 안되는 놈들이 급여와 고용과 복지까지 보장받으면 나 자신이 누리던 그동안의 기득권이 흔들리고 말 것이다. 학력도 학벌도 안되고 능력도 안되는 저들을 차별하는 것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다.

 

조국이 2030 남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였다. 아직도 2030 남성들이 사법시험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가 사법시험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사법시험이라는 제도가 남아 있어야 자신들에게도 그를 통해 판검사라는 기득권이 될 가능성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개천에서 가재붕어게로 잘사는 것이 아닌 당장이 힘들더라도 용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재붕어게에 불과한 노동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 집주인을 위한, 기업인들을 위한, 자산가들을 위한 정책이 오히려 자신들을 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되도록 해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 그렇지 못한 채 잘살게 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를 위해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여성과 외국인, 적대적인 외국이라는 대상들을 배제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그를 주장하고 요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으니 저들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혐오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할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에 이어 이태원 특별법에 대한 2030 남성들의 반발도 바로 이러한 정서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유가족들은 감히 자신들의 억울함을 정부를 향해 호소하고 있는 것인가. 놀러 나갔다가 죽은 것 아닌가. 심지어 죽지도 않았는데 무슨 피해자인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어도 알아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던가. 그보다 더 가치있는 문제들이 있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을 터다. 유가족의 자격을 따지고 피해자의 자격을 따지고 그러면서 정부가 하자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왜 따져묻느냐 오히려 비난하고 조롱한다. 물론 문재인 정부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여성을 배제하고 외국인을 배제하고 증오하는 적국과 적대해야 할 정부이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억울함이 있어도 국가가 요구하는대로 피해자든 유가족이든 인내하고 희생해야 한다. 노동자들도 임금을 스스로 깎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고용을 양보해야 한다.

 

웃기는 것이다. 당장 받는 월급이 너무 적다면서도 한 달에 30만원 이상 깎이는데도 주휴수당 폐지가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당장 몇 달 뒤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기간제 주제에 철밥통이라며 정규직을 줄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자기 몸이 안 좋아서 오래 일하기 힘들다면서 더 오랜 시간 일하는 것도 괜찮다 말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과 중국이다. 여성가족부다. 그런데 감히 그런 정부를 향해 유가족이랍시고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 같은 2030 세대들이 그토록 많이 죽고 다쳤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비난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튼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진상규명의 무용론을 설파하는 2030들을 보면서 저 새끼들에게는 뭔가를 해 줄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이준석을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이준석 말하는 꼬라지가 히틀러의 열화버전이기도 하다. 4050 남성들만 때려잡으면 2030 남성들에게 더 좋을 것이다. 거기에 호응하던 정의당이며 한겨레는 진짜 뭐하는 것들이었는지. 이유는 알겠지만 선택이 너무 혐오스럽다. 기득권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다. 그 부모세대가 아마 나와 같은 세대들일 테니. 남탓 할 게 아니다. 위험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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