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사용자와 남성 노동자가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충돌한다. 더구나 여성 사용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오너이고, 남성 노동자는 최저임금이나 겨우 받는 비정규 계약직이다. 그러면 과연 여성주의자들은 이들 가운데 누구의 편에 서게 될 것인가. 당연하지 않은가. 초유의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와중에도 다수의 여성주의자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가 부당하게 탄압당하고 있다 주장하고 있었다. 여성이 우선이다.

 

노동자라는 계급 안에도 다양한 정체성과 층위가 있듯 여성이라는 정체성 안에도 다양한 계급과 신분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잘나가는 변호사일 수 있고, 누군가는 몇 선이나 한 국회의원이기도 하며, 누군가는 대기업 사모님이거나 아니면 아예 자신이 대기업 오너이기도 하다. 당연히 겨우 최저임금도 못받는 빈곤한 처지의 여성들도 존재하며,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러니까 여성주의라 해서 과연 이 가운데 어떤 여성의 편에 설 것인가.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편들고자 하는 그들이 과연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일 것인가.

 

어째서 그토록 보편적인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진보주의자들이 타인의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침해하고 유린한 흉악한 범죄자들의 인권에마저 민감하게 관심을 가지고 하는 것인가. 당연하다. 국가라는 절대의 폭력 앞에서 모든 개인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시장 상인들에게는 사신과도 같은 조직폭력배조차 경찰이 나서서 체포하려 하면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떤 범죄조직도 국가보다 거대할 수 없으며 어떤 개인도 국가보다 강력할 수는 없다. 저 유명한 알카포네조차 체포되어 재판받고 감옥에 갇힌 순간 그저 무력한 수형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가 부당하게 위력을 행사해서 정도를 넘어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죄를 지은 만큼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지은 죄를 넘어서 그 이상의 책임까지 물으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칫 억울할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라도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묻고 싶다. 과연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강자인 것인가. 살아있는 여성과 죽은 남성 가운데 누가 더 사회적으로 강자인 것이다. 한 사람은 자기주장도 할 수 있고 한 사람은 변명조차 한 마디 자기 입으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더구나 살아있는 사람의 곁에는 수많은 언론들이 함께 있고, 죽은 사람의 곁에는 그저 죽은 이를 추모하려 남겨진 이들 뿐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에게 더 연민을 가지고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진실을 가릴 때는 가리더라도 최소한 떠난 이가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할 수 있기를 배려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이 되는 상식이란 것이다. 하지만 자칭 진보 가운데 누구도 그같은 최소한의 배려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있는 이들에게 죄인을 난도질하기를 언론이라는 힘을 빌어 강요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위증도 죄가 되지 않는다. 가까운 지인을 고발하도록 위력을 사용해 강요하는 것은 야만사회에서나 하는 일이다. 부모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식의 편을 들 수밖에 없고, 오랜 친구였기에 잘못을 알면서도 차마 입밖에 내어 비판하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결백을 증명하려면 부모라도, 형제라도, 친구라도, 오랜 동지였어도 마땅히 그 시신에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해야 한다. 무덤을 파헤쳐 오물을 뿌리고 시신까지 난도질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너도 공범이다. 너도 2차 가해자다. 가까운 이를 졸지에 잃고 겨우 떠나보내려는 이들이 어느새 강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어 단죄의 대상이 된다. 어째서? 자신들이 내린 결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과연 이런 것이 자신들이 편들고자 하는 약자들의 논리라는 것인가. 언론이 뒤에 없고, 검찰이 옆에 없고, 보수정당이 앞장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과연 당당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오로지 여성 뿐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에서도, 권력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래서 어느새 자칭 진보들의 담론에 사회적인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관련해서 과연 어느 자칭 진보가 정부와 여당의 편에서 기꺼이 비정규직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과 싸우려 했었는가. 지금 단지 자신이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10분의 1만이라도 나서 주었다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이토록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왜? 그들은 여성이 아니니까. 자신들의 정의란 오로지 전통적인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편에 서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차별금지법도 통과시키려는 것이다. 군가산점 위헌판결을 받아내던 당시와 같다.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2차가해라며 진실에 대한 어떤 의문도 가지지 못하게 틀어막고 있는 그대로 여성들에 대한 어떤 비판조차 듣지 않으려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을 앞장세우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권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여성주의이며 여성주의야 말로 시작이며 끝인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업 가진 좋은 배우자까지 있는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위해 자칭 진보가 부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자신도 역시 그렇게 되고 싶어서 여성들은 여성주의자를 흉내내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지금 자칭 진보들에게 여성 이외의 다른 사회적 약자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그랬다면 이미 죽은 사람을 모욕주고, 남겨진 이들마저 억압하며, 자신들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이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떠난 이의 죽음마저 조롱하고 모욕하며 철저히 짓밟는다. 최소한의 측은지심조차 없다. 인지상정조차 없다. 그런데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동정심이라.

 

실제 저들 자칭 진보들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실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언론과 논쟁을 통해 여론을 끌어가려 하기보다 정부와 여당을 꾸짖고 상처입히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다. 그래야 여성들에게 권력이 주어질 테니까. 자신들에게도 그 권력의 끝자락이 주어질 테니까. 진보의 사망이랄까? 멸망의 순간이랄까? 오래전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웃기는 꼬라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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