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만화대사 가운데 그런 게 있었다.

 

"나는 단지 자궁을 팔았을 뿐이다."

 

집안을 위해 다른 가문과 정략결혼을 했던 것을 두고 당사자인 여성이 무심히 내뱉었던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근대 이전 대부분 문화권에서 여성의 지위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여성의 순결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별 것 없다. 그래야지만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온전히 자신의 아이임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는 누구인가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지금도 첨단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계를 통해 상속이 이루어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임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다른 남자와의 관계 자체를 단절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자기 이외의 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된다. 괜히 왕의 궁정을 성기능이 없는 환관들로 채운 것이 아니었다. 

 

전통사회에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사유로 불임이 중요하게 꼽히곤 했던 이유인 것이었다. 아예 여성이 아이를 출산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결혼 전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것을 장려하는 문화권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굳이 부계의 계승이 중요하지 않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들의 경우는 단지 노동력만 확보할 수 있으면 되기에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식의 출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고귀한 신분들은 모계의 신분까지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고귀한 혈통의 여성에게서 후손을 보기 위해 비싼 댓가를 치르고 신부를 사오는 경우가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경우 당연히 비싸게 주고 사들이는 것은 여성 개인이 아닌 자궁이었었다. 얼마나 가치있는 자궁이냐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고, 자궁이 가진 가격에 따라 결혼의 가치가 결정되기도 한다. 앞서 만화의 대사는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후계자를 낳아 의무를 다한 이상 자신은 더이상 배우자나 자식이나 시댁인 가문에 어떤 책임도 의무도 짊어질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늬들이 다 알아서 하라.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도 그같은 사고에서 비롯된 귀족사회의 타락한 성문화가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냥 자식만 낳으면 된다. 각자의 가문의 이름을 이은 후계자만 하나 낳아주면 그것으로 서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 마음대로다. 남자만 바람을 핀 것이 아니었다. 후계자만 낳아주면 그 다음에는 아내가 어디 가서 뭔 짓을 하든 남자가 알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다른 여자 찾아서 마음놓고 즐길 수 있으니 더 좋았다.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피임방법이 고안되고, 뜻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중절수술도 시도되었으며,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게 되는 경우에는 출생의 비밀 같은 것도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미 필요를 다한 자궁은 더이상 간섭도 감시도 억압이나 구속도 필요치 않다. 사실상 방치다. 가치가 잃은 자궁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바로 그런 시대였기에 전근대사회에서는 여성의 순결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노동력으로서의 아이만이 더 많이 필요했을 뿐 혈통이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계층에서는 순결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아니기도 했다. 유력자의 사생아를 낳은 여성이 그보다 낮은 신분의 남성과 결혼해서 그 아이를 남성의 아이로 기르곤 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여성은 단지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궁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양과 질이다. 고귀한 신분에서는 자궁의 질을, 비천한 신분에서는 자궁의 양을, 결국은 여성이란 자궁이었다. 그래서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에게는 이름이란 것이 없었다. 성이 없어서 남성의 성을 따라야 했고, 성도 없이 이름도 절반만 써야 했으며, 이름이 주어지더라도 남성과는 다른 비천한 이름만이 주어졌다. 그렇기에 그런 시대에서 여성의 가치란 다른 무엇도 아닌 단지 성적인 의미 그 자체였던 것이었다.

 

내가 한국 여성주의자들을 두고 기생페미니즘이라 단정지어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20대이던 시절에 주위에 있던 누님이나 동년배들 가운데는 여성이라고 배려하고 하는 걸 아주 끔찍이도 싫어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무거운 것도 자기가 알아서 들고, 힘든 일도 남성들에 뒤지지 않게 자기가 노력해서 해내며, 남성들에게 도움과 배려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주체로써 여겨지기를 바라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여성이란 당연히 인격 그 자체였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존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성의 존재와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 여성이 가진 능력과 그 능력으로 일구어낸 결과과 그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위치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주로 떠드는 것은 단지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오래전 당연하게 여겨졌었던 자궁으로서의 여성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성들에 의해 여성은 어떤 지위를 부여받고 어떤 신분을 누리게 될 것인가. 그를 위해 여성의 자궁은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가.

 

여성이 법조인으로서 대등하게 다른 남성변호사들과 경쟁하며 지금의 위치를 일구어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 치열한 삶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 그가 지금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한 것인지 아예 전혀 관심조차 없다. 그보다는 성범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심지어 그마저도 선택적이다. 특정 정당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심한 경우에조차 아예 입다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직 검사출신이고 법무부차관까지 지냈으니 김학의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하며 출국금지는 부당했다고 하는 다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같은 여성인 계약직 노동자의 삶보다, 같은 여성으로서 실제 현실에서 남성들과 부대끼며 경쟁해야 하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놓인 현실보다, 그저 자신들이 보기에 불쾌한 특정한 사안들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바로 성인지감수성이다. 성적인 대상으로서 여성에 대한 예우다. 여성을 성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것만이 오로지 절대의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법조인으로서 그가 살아온 궤적보다 성범죄에 대한 변호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이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 것인가. 앞서 괜히 쓸데없이 길게 끄적여 놓은 서두가 바로 그를 말하기 위함인 것이다.

 

여성의 정조는 보호되어야 한다. 여성은 오로지 성적으로만 보호되어야 한다. 여성이 기자로서 가져야 할 직업윤리보다 여성이라는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위치에만 집중한다. 성범죄라 여기는 사안에 대해서 개개인의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판단보다 같은 성적인 존재로서의 동의만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아내인 여성의 신분은 더욱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단지 자신들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성범죄에 대한 고발을 부정하고, 심지어 남성인 상급자를 움직여 징계하려는 시도들은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인 것이다. 그들의 여성주의에는 여성이 없다는 이유인 것이다.

 

역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다. 여성의 지위가 낮을수록 창녀의 지위는 오히려 높아진다. 말한대로 여성이란 단지 자궁이기에 이미 결혼한 여성을 존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후계자까지 이미 낳았다면 더이상 그 필요와 쓸모를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디서 누구와 바람나든 내 핏줄에 정체도 알 수 없는 다른 핏줄을 섞는 것만 아니면 뭘하든 내가 상관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자궁으로써가 아닌 여성 그 자체로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수 있는 창녀가 이미 배우자로 있는 여성보다 더 가치있을 수 있는 것이다. 황진이의 경우처럼 역설적이게도 자궁으로서의 가치가 없기에 그녀들은 온전히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또한 남성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한 결과다. 그리고 그 선택을 받기 위해 여성들은 더 많은 노력을 하고 경쟁도 해야 한다. 다른 경쟁자를 제거하고 더 나은 주인을 선택해야 한다. 과연 과거의 그같은 여성의 현실과 지금 여성주의자들의 주장 가운데 위상학적으로 다른 부분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한국 여성주의를 혐오하는 이유일 것이다. 혐오한다기보다 경멸한다.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여성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지위를 쟁취하기 위한 여성주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도구로 삼아 그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성인지감수성이었고, 그리고 지금도 터져나오는 선택적인 여성주의자들의 분노다. 성범죄는 단지 그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존중할 이유가 있을까? 딱 2찍 진보들 수준인 것이다. 그래서 수박들인 것이었고. 역사는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국 여성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여성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