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처음으로 취직해서 월급이라는 것을 받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정말 많았다. 어디에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고 계획을 세웠다가 수정했다가 허물기도 했다가. 그런데 지금 월급날이 되면 딱 한 가지 돈이 제대로 통장에 들어왔는가만 확인한다. 어차피 돈을 버는 것도 쓰는 것도 당연한 일상이 되었기에 일단 돈만 제대로 들어와 있으면 나머지야 어떻게 한다.


시합만 했다 하면 지는 축구팀이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어렵사리 이기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압도적인 실력차만 확인하며 패배를 늘리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느날 시합을 하는데 그날따라 운이 따르는지 전반에만 4골차로 앞서기 시작했다. 과연 선수들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점수차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더 열심히 몰아붙여서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의 기회를 최대한 누려보고자 할까? 아니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은 패자에 대한 동정으로 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될까? 그래서 틈을 보이면 다시 역전을 당하기도 한다.


그동안 너무 많이 져왔기 때문이다. 한 번도 속시원하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했을 때도 그것이 진짜 자신들의 승리인가 의심해야만 했었다. 그만큼 탄핵역풍을 등에 업고 총선을 맞는 열린우리당의 공천이나 공약, 전략등은 형편없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이나 이후나 김대중과 노무현을 당선시킨 두 번의 대선을 제외하고 그나마 애써 합리화시키면 이겼다고 할만한 승부가 한두번 있었을 뿐 거의 매번 지는 선거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만일 선거에서 이겻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에 하나 선거에서 이기기라도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망상 뿐이다. 이제 승리가 다가왔으니 승리한 다음을 생각하자. 


벌써 적지 않은 민주당 - 그보다는 야권지지자들이 문재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자 심상정의 지지로 돌아서는 이유였다. 문재인의 승리가 확실해졌으니 이제는 한국서회에서는 아직 미약한 진보정당에 힘을 실어주자. 진보정당이 제도권에서 한국사회를 보다 건전하게 감시하고 견인할 수 있도록 힘이 될 수 있게 한 표를 보태주자. 아직 이겼다고 발표가 나기도 전이었다. 이기더라도 얼마나 이겼는가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김칫국부터 마신다. 떡이라고는 먹어본 적 없으니 지레 기대를 부풀리며 떡도 먹기 전에 김칫국부터 한참 들이킨다. 일단은 이기고 나야 뭐라도 시작할 수 있다. 이겨도 압도적으로 확실하게 이긴 다음에 뭐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언제 과거 새누리당이 승리 앞에서 주저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악랄할 정도로 승리 그 하나만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어떤가?


결국 따지고보면 2012년 정권심판의 여론이 우세했던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선에서도 민주당의 후보였던 문재인 또한 선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는다.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절대 한눈을 팔지 않는다. 보수라고 하는 정체성마저 아예 포기한 듯한 박근혜의 공약집과 전혀 자신의 위치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듯한 문재인의 공약들을 비교해 보라. 선거에서 이기고 무엇을 할 것인가만을 생각했지 선거에서 이기는 그 자체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20016년의 총선에서는 개헌선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인해 어떻게든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하고 집요한 의지를 특히 전대표였던 문재인을 중심으로 민주당 전체가 보여주고 있었다. 절대 져서는 안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이제 지난 정부들의 잘못을 심판하고 바로잡기 위해서는 더 큰 국민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겨야 한다. 문재인이 공약한 적폐청산을 위해서도. 박근혜를 처벌하고 그 부역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도. 그동안 저질져온 모든 부패와 부정들을 밝혀내기 위해서도. 자신들이 꿈꾼 새로운 나라를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서. 지난 대선과는 달리 문재인이 거의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받아들여 캠프를 꾸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혁신안을 적용하여 당을 개혁했고 이제는 문재인 자신이 아닌 당의 이름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계파도 이념도 성향도 전부 묻어둔다. 서로 대립하고 적대하던 사이에도 일단은 손부터 잡고 행동을 함께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모아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선거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는 일단 그 위에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 문재인이 벌써 재작년에 말한 것이 있었다. 섣부르게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 하나라도 확실하게 이루고 지속가능한 개혁과 집권이 가능하도록 만들겠노라고. 그런데 정작 지지자들은 당장의 승리에 취해서 나 하나 쯤이야 대열에서 이탈하고 있으니.


물론 정의당 지지자들이야 원래 자신들의 정당이고 후보인 정의당의 대통령후보 심상정을 지지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원래는 문재인을 지지하려 했던 어찌되었거나 야권지지자들일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하고 문재인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승리가 확정되었으니 내 표는 다른 곳에 쓰겠다. 승리보다 더 가치있는 일에 쓰일 수 있도록 최대한 보태겠다. 그래서 지지율이 떨어진다. 홍준표는 어느새 바른정당의 국회의원들과도 입을 맞추고 보수권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나마 심상정의 득표율마저 15%로 만들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만일 그 표가 모두 문재인으로부터 나온다면 정권교체는 커녕 자칫 홍준표라고 하는 싹수가 없는 인물에게 앞으로 5년동안 나라살림을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


뽑아주고 반대하면 된다. 일단 지지하고 나서 마음과 맞지 않으면 반대하여 저지하면 된다. 그 전에 먼저 뽑아주어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여소야대 정국에서 의회의 지원 없이도 국민의 지지만으로 확실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정의당은 민주당과 동반자관계인가. 심상정과 문재인은 같은 정치적 이상과 목표를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인가. 그러니까 선거가 끝나고 여당과 야당으로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공조를 함께 할 것인가. 그럴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심상정은 우리편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심상정은 문재인의 표를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끌어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심상정에게 문재인의 것이었을 수 있는 한 표를 더하게 된다니. 문재인이 낮은 지지율로 집권 초반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승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른다. 철저하고 완벽한 승리야 말로 내일을 위해 얼마나 간절한가를 알지 못한다.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길 때 압도적으로 사정따위 봐주지 않고 오로지 이겨야만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겼으니 됐다. 이쯤 이겼으니 자기와 전혀 상관없다. 선거는 단지 정지작업에 불과하다. 진짜 개혁은, 적폐의 청산은 선거가 끝나고 당선자가 가려진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의당 지지자는 정의당을 지지한다. 민주당 지지자는 민주당을 지지한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는 곳에 중도가 있다. 자칫 자신에게로 오게 될지 모르는 표를 잡는다. 민주당의 승리야 말로 내가 원하는 정치와 가장 가깝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직 이기지 못했다. 이겼어도 끝이 아니다. 이기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이다. 그 절박함을 떠올린다. 아직 시작도 못했다. 벌써 마음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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