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몽골에 항복할 때도 최씨정권의 뒤를 이은 무신 실력자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그래서 하극상으로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을 주인공으로 드라마까지 만들어진 것이었다. 몽골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으니 이들이야 말로 민족의 영웅 아니겠는가. 한때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까지 몽골에 대한 항복에 반대하여 목숨을 걸고 맞싸웠었다. 하지만 지금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전과 다르다. 왜일까?

 

인조가 청에 항복하고 조선은 군비에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조선의 군비에 대해 항상 감시당하고, 성을 수리하거나 할 경우 보고하고 허락까지 받아야 했다. 당연했다. 기왕에 종주국이 되고 속국이 되었는데 그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최소한 무효화시킬 수 있는 힘을 속국이 가지는 것을 허락할 종주국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바쿠후도 참근교대 등을 통해 전국의 다이묘들을 무력화시켰던 것이었다. 실제 고려 역시 몽골에 항복하고 영토도 떼주고 상당한 내정간섭까지 받으며 당연하게 군비까지 제한당해야 했었다. 문제는 무신정권들이 그동안 고려의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던 그거가 바로 그 군사력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최씨정권이 거란의 침략과 몽골의 침략이란 국난에서도 정작 자신들의 사병인 중앙군을 아끼며 개경과 강화도에 주둔시키고 있었던 이유였다. 이들은 오로지 안전한 후방에서 백성들을 수탈하며 거부하는 백성들을 도륙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그놈들이 바로 얼마전까지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었던 삼별초란 것들이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죽어나가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동안에도 그놈들은 강화도에 숨어서 온간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감히 누구 하나 그에 저항하지 못했었다. 그에 도전할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결국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것도 최씨정권의 군사력을 중간에서 착복한 다른 무신들이었다. 최씨정권의 가신이었던 김준과 같은. 그리고 그들 역시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시금 이전의 무신정권처럼 되고자 하고 있었다. 문제는 더 이상 고려의 중앙군이란 것이 그들의 권력을 지탱해줄 만큼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고려의 군사력이란 고작 강화도와 아직 몽골군이 약탈하지 않았거나 이미 약탈하고 지나간 일부 지역에나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이 만에 하나라도 무신정권의 대적자에게 힘을 실어 줄 경우 아무런 명분도 체계도 없이 그저 군사력만으로 일어선 무신정권은 그대로 무너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의 국왕과 태자가 몽골군을 등에 업고서라도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항복조건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순조롭게 항복협상이 이루어졌다면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몽골을 등에 업고 고려의 국정을 다시 고려의 왕가가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신들은 끝까지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항복조건은 더 나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과연 고려를 위한 것이었는가? 고려의 백성들을 위한 우국충정에서였겠는가? 그리고 몽골이 고려 국왕의 편에 선 순간 예정대로 무신정권은 철저히 몰락하고 말았다. 고려말의 무신들이란 그래서 몽골항쟁기와 달리 대부분 권문세족 출신으로 자신들의 사병을 기반으로 중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들이란 것이다. 그것이 고려의 항복과 무신의 저항이라는 역사의 진실이다. 이면도 아니다. 다 드러나 있었으니. 그래서 삼별초도 뒈지기 싫어서 항복을 거부하고 날뛰었던 것이었다.

 

얼마전부터 남송의 명장 악비의 죽음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과연 악비가 마지막까지 금과 맞서 싸우려 한 것이 오로지 우국충정 때문이었는가? 설사 사실이더라도 당시 남송의 조정이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고 있었을 것인가. 악비가 금군과 싸워 연전연승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대부분 전해지는 승전기록이란 악비의 후손들이 작성한 행장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의 승전은 매우 초라하고 정국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임경업이 병자호란 당시 백마산성을 잘 지켜서 청군이 우회케 했다 할지라도 결국에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는데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남한산성에서도 아주 작은 승리라 할 만한 싸움이 아주 없지 않았었다. 그래서 과연 악비의 승리는 남송의 열세를 뒤집고 금에 대한 반격을 시도할 만큼 거세고 압도적이었는가? 그렇다면 악비의 주장을 받아들여 끝까지 금과 적대하는 것이 남송의 입장에서 과연 좋기만 한 일이었겠는가?

 

그러고보니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강유다. 촉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이랄 수 있는 강유였지만 그러나 촉에서의 대우는 악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쓸데없는 싸움으로 촉의 국력만 소모시킨다. 자잘한 승리는 몇 번 있었지만 결정적인 승리 없이 촉의 내정에 크게 부담만 지운다. 더구나 강유의 존재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한중의 군사력은 촉의 조정과 별개로 따로 움직이는 경향마저 보였다. 장완과 비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비의마저 죽고 나자 강유는 자기 마음대로 한중의 군사를 움직이며 위와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촉은 아직 결정적으로 위에 패퇴한 적 없이 오히려 위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가던 상황이었다. 황제와 황족들이 죄다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아예 절딴나다시피 했던 남송의 상황과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금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군사행동만을 주장하는 악비의 존재가 남송의 조정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과 강화가 이루어질 경우 군사적인 적대관계가 일부라도 해소되면 군부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욱 줄어들고 말 것이다. 과연 악비와 한세충의 강화반대에는 이같은 상황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는가?

 

아마 그래서 이전까지 우국충정에 불타는 능력까지 갖춘 충신이었던 진회가 악비의 죽음에 즈음해서부터 갑자기 간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일 게다. 당시 남송의 입장에서 봤을 때 금과의 강화는 불가피했다. 아직 남송이 자리한 강남 전역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에는 남송 조정의 행정력도 지배력도 충분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혼자서 도망쳐 온 황제의 권위는 매우 미약했고, 전대 황제들마저 금에 포로로 잡혀 있었기에 정통성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오죽하면 조정이 중앙군을 제대로 만들고 운영하지 못해 몇몇 군벌들이 병사를 모집해서 독자적으로 금과의 항전을 이어나가고 있었겠는가. 그러고보면 선조가 이순신을 경계한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군사도, 배도, 무기도, 식량도, 물자 하나까지 차라리 몽진해 있던 조정이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전쟁이 일어난 이후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런 상황에 그런 무신들에 의지해서 금과의 기약없는 전쟁을 이어나간다? 남송 조정에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남송의 황제 고종과 진회가 악비를 죽이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악비와 한세충 등 군벌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던 사병들을 중앙군으로 재편하는 당연한 과정도 거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악비가 자신의 사병을 중앙군에 편입하는 것을 반대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에 군벌이 소유한 사병은 중앙정부에 위협이 되고, 그 사병을 중앙군으로 재편하기 위해서라도 군벌의 해체는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숙청이란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악비의 죽음을 계기로 한세충까지 은퇴하면서 남송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군벌은 어찌되었거나 최소한 사라지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경우 악비의 죽음이 그렇게까지 무리한 일이었겠는가. 다만 민간의 입장에서는 그런 정치적 사정과 상관없이 침략자인 금과 끝까지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 악비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후 어느 정도 내정이 안정된 뒤에는 남송 조정에서도 금과 맞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악비를 다시 복권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사정들이 지금의 악비와 진회의 위상을 만들었다.

 

악비가 죽어야 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악비가 충신이었고 명장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시 남송에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 남송에 필요했던 것은 북송이 망하고 막 남송이 일어난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누군가였다. 금과의 전쟁은 그 다음에 생각했어야 했다. 당장 금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면. 진만인적이라던 한세충도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남송으로 후퇴해 있었다. 당연했을 것이다. 역사란 때로 너무 당연해서 부조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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