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군쟁편의 귀절이다. 아침의 기운은 날카롭고 낮의 기운은 느슨하며 저녁의 기운은 흩어진다. 비단 하루의 아침과 낮과 저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정이 길어지면 실패하기 쉬운 이유다. 처음 원정을 시작했을 때는 사기가 충천해 있다. 하지만 조금씩 원정이 길어짐에 따라 병사들은 지치고 흩어지며 마침내는 대장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기만 한 타지에서 타인을 향한 적의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명분이 중요하다. 동기다. 그럼에도 싸워야 한다.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 병사들을 설득해야 한다.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성공한다면 그나마 조금은 더 오래 지휘관이 의도한대로 전의를 유지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격하는 쪽이 유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방어하는 쪽이 더 유리해지는 것이다. 남의 땅을 쳐들어가 뺐고자 하는 쪽과 그들로부터 지켜야 하는 쪽 가운데 어느 쪽의 동기가 더 강하고 더 길게 유지될까. 당장 임진왜란만 보더라도 침략자를 이 땅에서 몰아내햐 한다는 한 가지 당위에 조정과 백성이 모두 하나가 되었던 조선에 비해 불과 1년도 채 지나기 전부터 일본군은 어떻게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계산에 바빠지고 있었다. 이기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전쟁이 지지부진해지면 바로 본전생각이 나고 고향생각이 난다. 평화롭고 안락한 고향에서의 생활이 그리워진다. 공격은 그래서 빨라야 하고 방어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공격을 늦추는 것으로 성공일 수 있다.


일본 전국시대의 끝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항복한 다이묘들을 이끌고 호조씨의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을 때도 워낙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오다와라성을 직접 공격하기보다 포위하고 시간만 끌자 탈영이 속출하는 등 군기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마 당시 다테 마사무네가 호조씨가 처음 세운 전략대로 토요토미에 항복하지 않고 후방을 교란하며 보급을 차단했다면 자칫 오다와라성을 포위하다가 자중지란으로 자멸했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토요토미의 힘에 굴복했을 뿐 마음으로부터 충성하지 않던 다이묘들이었기에 조금만 상황이 불리해지면 전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몰랐다.


사실 알아도 정작 실천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심리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과 관계된 것이다. 고향을 떠나와 낯선 타지에서 오랫동안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누군가에 대한 적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처음에는 승리에 들뜨거나, 혹은 욕망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감정적인 선동에 동조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욕망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진다. 아무리 큰 원한이나 증오도 당장 내 몸이 불편하고 고단하면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때 어떻게 병사들이 납득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가. 이릉싸움에서 유비가 저지른 가장 큰 패착이었다. 아무리 유비 자신의 오에 대한 복수심이 간절하더라도 병사들까지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관우와 장비의 명성이 높고 인망이 대단해도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며 복수할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비의 설득에 넘어갔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만다.


육손이 처음 이릉에서 지휘를 맡고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기보다 수비로 일관하며 시간을 끌었던 이유였다. 촉군은 침략자다. 오군은 방어자다. 처음에야 촉과의 동맹을 배반하고 형주를 공격해 관우까지 죽인 오에 대한 분노가 더 강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는 것은 남의 땅을 쳐들어온 침략자와 그로부터 자신의 땅을 지켜야 하는 방어자라는 단순한 구도만이 남는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군의 사기와 전의를 전처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끈이 살짝 느슨해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면 유비군은 결국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하고 마는 것이다.


그 정도 장기적인 대치에도 불구하고 군의 사기와 전의가 유지되는 경우가 신기한 것이지 싸움조차 않고 시간만 끌고 있으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굳이 유비와 직접 겨루어 만에 하나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유비가 복수가 아닌 다른 명분으로 오로 쳐들어갔다면? 더 절실한 다른 명분으로 병사와 장수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목적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면? 그래서 거꾸로 육손에게 군의 사기와 전의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지워졌다면. 그래서 제갈량과 조운의 간언이 옳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비군이 설사 패하더라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한실부흥이라는 가장 큰 명분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왕조를 재건하고 백성의 삶을 평화롭던 시절의 그것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유비는 명분을 잃었고 장기전을 치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가지지 못한 채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전력에서 압도적이지 못하기에 속전속결도 불가능했다. 시간을 끌게 된 순간 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황권도 대치가 길어지자 자기가 먼저 싸움을 걸겠다며 변화를 시도했던 것이었다.


화공에 당해 대부분의 병사를 잃은 와중에도 여전히 병사를 수습해서 퇴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비의 대단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전면퇴각을 하는 와중에 육손의 추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는 상황에서도 병사를 최대한 수습하려 노력한 결과 결국 강주에서 출발한 조운의 구원군에 구함받을 수 있었다. 지는 싸움을 수습하는 것도 지휘관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는 하다.


늪과 숲을 중심으로 진을 7백리에 걸쳐 길게 펼쳐놨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각개격파당했어도 결국 그 중심은 유비가 주둔하고 있는 중군일 터였다. 중군이 유지되면 어떻게든 조직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그 중군이 무너졌다. 화공에 당한 것은 결국 경계에 실패한 것이다. 군기가 느슨해져 있다는 증거다. 의미없는 싸움에 목숨은 걸 수 없다. 당연한 사실이다.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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