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도 말씀하셨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

 

그래서 어느 학교 어느 교실에나 공부만 잘하는 찐따가 최소 하나는 있었다. 공부만 할 줄 알지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른다. 대부분이 아는 일반적인 상식은 물론 최소한의 사교를 위한 기술도 노력도 아예 무지하다. 괜히 예전 사법시험 준비하다가 뒤늦게 군대 온 선임이 사법시험 공부하는 놈치고 멀쩡한 놈이 없다 말한 것이 아니다. 

 

최근 짤로 꽤나 화제가 되고 있는 만화가 시마모토 카즈히코도 그래서 자기 만화에서 이런 명대사를 남기고 있었다.

 

"골방에 쳐박혀서 만화면 그리던 새끼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었을 리 있겠나!"

 

선천전 소시오패스가 아닌 후천적 소시오패스인 것이다. 비슷한 부류로 오타쿠가 있을 것이다. 오타쿠 역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건 비슷하니. 주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하려 하기보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래도 되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가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만화라거나, 영화라거나, 특정한 캐릭터라거나. 그래서 전혀 주위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만 행동하며 그것을 스스로 납득하고 마는 것이다. 하물며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도 선생님도 모두 칭찬만 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전근대 왕조국가들이 오래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다. 왕의 핏줄이라고, 더구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라고 제대로 쓴소리를 들려줄 사람이 드물다. 뭐라 해도 다 들어주고 어떻게 해도 다 용인해준다. 그런데 아예 궁궐 안에서 보던 사람만 매일 보며 살아야 한다. 그런 놈이 왕이 된다고 제대로 된 왕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암군, 혼군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도대체 뭐라 해도 들어 쳐먹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엉뚱한 소리만 내뱉는다. 그런 놈이 심지어 영감소리 듣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어떻게 되겠는가?

 

사법시험 폐지되어 다행이라 여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래도 로스쿨이라도 다니면서 다른 사람도 만나고 해야지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골방에 쳐박혀서 법전만 보고 있으면 멀쩡한 사람도 쓰레기가 되기 쉽다는 이유다. 사법시험 출신들이 맹하거나 독하거나 둘 중 하나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물정을 모르면 맹하고 그런데도 독기를 가지고 공부만 해댔을 테니 독하다. 그런데 그 방향이 어딘가 틀어져 있다. 다만 같은 이유로 방황도 했었고 현실의 어려움도 몸으로 겪어 알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꽤나 외골수로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경향도 보인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같을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주위를 보지 못한다. 자기만의 정의감과 선의에 사로잡혀 정작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고개만 파묻고 있으면 상대가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하니 상대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언론 정도일 것이다. 이전에는 기무사나 국정원이 검찰을 제대로 견제하면서 때로 농락도 했지만 민주정부를 통해 무력화된 지금은 검찰을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주체라고는 겨우 언론 하나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언론이 검찰이 원하는대로 그냥 받아써주기만 한다. 아니 언론 자체가 검찰과 비슷한 놈들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나 언론고시라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권력을 바라고 공부만 해서 스펙만 좋은 놈들이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검찰과 어울리려 한다. 그렇게 비슷한 부류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자가발전을 한다. 절차탁마가 아니다. 자가발전이다. 검찰은 언론을 띄우고 언론도 검찰을 띄우고. 그러니 뭘 해도 포장되고 뭘 해도 미화된다. 조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너무나 뻔한 내부갈등쇼를 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다. 대부분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에 불만을 가진 지지자들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뿐 중도층에서까지 어차피 선거용 쇼일 것이라며 콧방귀나 뀌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화재가 난 현장에 갔으면 피해자들도 만나고 위로도 하고 돌아와야 할 것 아닌가. 만나서 화해쇼 한 번 하고 그냥 돌아온다. 그래도 통할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나경원이 그랬었던 것일까? 나경원이 국쌍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듣는 사람을 바보로 여기는 언행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짜 저 말을 믿으라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뱉는 것인가? 그런데 진짜였다.

 

하긴 그동안 한동훈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뱉는 언행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나 2030 남성들이 좋아한 것이기도 했다. 딱 공부 잘하는 모범생의 말투다. 다만 나와 같은 부류들의 기준으로는 그냥 공부만 잘하는 찐따다.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모지리들이 학교에서도 딱 저런 말투를 썼었다. 이준석도 비슷한 과다. 참고로 2찍 진보들 가운데서도 저런 말투 쓰는 놈들이 꽤 된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인터넷에서 키배 뜨면서 책으로만 세상을 아는 놈들이 참 많구나 진지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어 주었던 놈들이다. 2찍 진보가 괜히 윤석열 정부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사과할 발언이라도 했던 김경률에 비해 문재인 정부에서 그리 말많던 자칭 진보 가운데 그 정도라도 발언하는 놈들을 본 적이 있는가. 

 

현정부의 수준이자 언론의 수준인 것이다. 사실상 현정부와 언론은 한 몸이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성과다. 여성주의에 여와 야가 없는 것처럼 언론에도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이고 언론은 그냥 언론이다. 언론인인 연 하는 지식인들은 그냥 언론의 찌그레기들이다. 박노자가 소중한 이유다.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 가운데 멀쩡한 지식인은 박노자 하나 뿐이다. 아무튼 어째서 현 정부가 이지경까지 왔는가. 이런 지경까지 보여주고 있는가. 새삼 기억도 가물한 오래전 교실풍경을 떠올리고 마는 이유다. 그때도 그런 놈들이 있었다.

 

부모들 잘못이다.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 그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 사법시험 잘봐서 판검사만 될 수 있으면 된다. 혹은 의대 가서 의사만 될 수 있으면 된다. 판검사와 의사 가운데 멀쩡한 인간이 드문 이유다. 좋은 대학 나와서 지식인인 연 하는 놈들도 비슷하다. 우리 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지금 2030이 저모양이지. 미안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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