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이 기득권인 이유는 이미 그들이 한 사회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주류로써 한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기에 보수는 강한 것이다. 보수란 자체가 기존의 구조와 질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기득권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반면 그 구조와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항상 소수로써 탄압받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약자에서 시작했거나, 기득권 가운데 변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도 소수이기에 약자가 되어 버리거나. 그러면 어떻게 약자인 이른바 진보세력은 항상 역사에서 개혁과 심지어 혁명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혁명 당시 같은 산악당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마라, 에베르의 성향이나 지향은 모두 달랐었다. 심지어 당이 다른 라파예트나 베르니오, 브리소 등도 전혀 다른 목적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소비에트 또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이라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주체들의 연합이었다. 그리고 이들 소비에트는 혁명 초기 자신들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자본가와 지주들로 이루어진 임시정부와도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물론 혁명이 성공하고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보다 선명한 지향을 위해서 다른 정파들을 숙청하며 권력을 독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과도적 연대였던 것이다. 일단 왕정을 무너뜨리기까지 서로 함께 손을 잡고 이후 각자 알아서 투쟁을 통해 승자를 가리자.

 

전국시대 소진이 주장한 합종이란 나머지 육국이 혼자서는 진을 막아내기 어려우니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함께 진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진이 전국을 통일하고 각지에서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반란군들 역시 그래서 진을 무너뜨리기까지 목적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에 마지막까지 대항했던 초의 왕족인 회왕이 반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공동의 목표였던 진이 멸망하자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각지의 세력들은 서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분열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위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삼국지에서 촉과 오가 서로 동맹을 맺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상대가 강하면 약자끼리 손잡고 힘을 모아 함께 대항한다. 기득권이 기득권인 이유다. 아무리 시민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나와 물러나라 외쳐봐야 왕에게는 군대가 있었다. 파리와 모스크바를 제외하고도 고도로 발달한 국가조직이 왕정을 지탱하고 있을 터였다. 과연 자신들만의 힘으로 그 모두를 상대하여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당장은 서로 성향도 지향도 다르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이해도 결론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당장 눈앞에 있는 강적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자기들끼리 결정낼 문제인 것이다. 나중에는 서로의 이해에 따라 대립하며 싸우더라도 당장은 국왕의 전제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이 함께 손잡고 국왕으로부터 받아냈던 마그나카르타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왕부터 꺾고 나서 자기들끼리의 문제는 자기들끼리 나중에 해결하자. 그래서 연대인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마지막에 서로 싸우기 전까지 강적을 물리치는 동안 함께 손잡을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약자였던 진보가 연대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꾀해 왔던 이유이기도 했다. 소수이고 약자인 진보도 연대를 통해 얼마든지 다수가 되고 강자가 될 수 있다. 내각제 아래에서 연정은 진보가 국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었다.

 

과연 진보에게 공동의 적은 누구인가? 연대할 대상은 누구인가? 누구와 어느만큼 공통점이 있고, 따라서 서로 연대할 수 있을 만큼 접점을 가지는가? 재미있지 않은가? 저 중국공산당조차 혁명을 준비할 때는 그토록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아나키스트와 연대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도 군벌들보다야 아나키스트 쪽이 자기들과 더 가깝지 않겠는가. 노동, 인권, 환경, 평화, 자유, 평등, 젠더 등 여러 진보이슈들에 있어 보다 성향상 가깝고 그래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이 제도권에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보수라는 말조차 애매해지는 국민의힘인가? 아니면 그래도 한때 민주화운동이며 진보운동도 함께했던 민주당일 것인가? 그렇다면 연대를 통해 타도해야 할 공동의 적은 누가 될 것인가? 항상 진보적 가치들에 대해 적대적이던 여전한 기득권집단인 국민의힘일 것인가, 그를 바꾸려는 민주당일 것인가?

 

사실관계만 살짝 뒤집으면 답은 바로 나오는 것이다. 어째서 민주당이 공동의 목표가 되는 것인가? 어째서 민주당을 무너뜨리기 위해 국민의힘과 연대해야 하는 것인가? 즉 누구와 더 공통점과 접점이 많고 누구와 더 적대하는 관계인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진보가 아니라고. 그냥 진보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자칭 진보라 부르는 것이다. 누구와 더 가까운가? 누구와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그 공통의 목표를 위해 타도해야 하는 최우선 적은 누구일 것인가? 그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가치란 무엇을 위한 진보적 가치인가? 일단 수구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고 그 아래에서 허락을 얻어 이루어내는 진보인 것이다.

 

가만 몇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라. 지금 정부만 욕하고 있는 자칭 진보들 상당수가 당시 보수정부 아래에서 열심히 강연도 다니면서 진보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정부가 제발 들어주기를. 보수정부에서 제발 자기들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투쟁은 없었다. 연대도 없었다. 하소연만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자기들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가. 그런데 민주정부에서는 그조차도 없다. 진보운동 자체가 사라졌다. 맹목적인 정부에 대한 증오와 혐오와 경멸의 감정과 배설만이 존재할 뿐이다. 진중권이 앞장서서 욕먹으니 가려진 것이지 다른 자칭 진보 인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저들의 정체성에 이념과 지향이 서로 다르더라도 정서적으로 더 가까운 것은 보수정당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민주당 2중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국민의힘 2중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2중대는 이미 국민의당이 있으니 3중대 쯤 될 테지만 첩이라도 좋다는 애닲은 사랑의 고백인 것이다. 바로 진보의 정체다.

 

정상적이라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가치들을 현실로 이루어내기 위해서 가까운 연대의 대상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 자신들과 가장 가깝고, 그러므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최대한 근사치로 이루어내는데 함께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온전히 모두 이루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가깝게 이루기 위해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어느 정도 양보하며 공동의 전선을 만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더 정서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가. 누구를 더 가까운 연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진보의 정체성인 것이다. 민주당인가? 아니면 국민의힘인가?

 

전부터 말해 온 내용인 것이다. 한국 진보의 진보란 쟁취하는 진보가 아닌 윤허받는 진보라고. 보수권력으로부터 허락받고, 보수언론으로부터 용인받아서, 보수기득권의 묵인 아래 이루어지는 진보인 것이다. 보수가 인정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보수가 허락하지 않는 진보도 진보가 아니다. 자칭 진보와 민주진영이 갈리는 부분이다. 보수와 싸우려는가? 보수의 허락을 받아내려는가? 정확히 보수가 아닌 수구기득권이다. 저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 수구기득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철회되어야 한다. 최저임금인상도 근로시간단축도 모두 좌절되어야만 한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작년 패스트트랙정국 당시 정의당이 시간을 끈 것은 연동형비례대표제가 아닌 검찰의 수사가 청와대에 타격을 주어 검찰개혁 자체가 무산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아무튼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물론 너무 오랜 이제는 익숙해진 이야기다. 한국 진보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 진보의 정체성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누구와 함께 하는가? 그래서 나는 그들을 절대 진보라 부르지 않는다. 자칭 보수처럼 자칭 진보라 부를 뿐이다. 더 명확해졌다. 수구기득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정의연을 공격하며 위안부의 역사를 버리는 그 장면에서부터. 민주당 2중대는 싫지만 국민의힘 2중대도 아닌 3중대조차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히려 영광이지 않을까. 원래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연대의 대상이 그 정체성을 말해준다. 당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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