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어느 소설의 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강대국에서 압도적인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니 약소국의 지휘관이 결사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벌여 그를 저지하려 한다. 말 그대로 종횡무진 신출귀몰하며 각지에서 적의 대군을 괴롭히는데 지휘관은 동요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래봐야 아직 자기들이 더 크고 더 강하니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 왕도를 함락하면 저들의 저항도 끝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버티지 못하고 야전에서 싸웠다가 약소국이 패망했다던가 어쨌던가.

 

백제의 명운을 건 황산벌에서의 마지막 저항이 그랬었다. 5만의 신라군을 상대로 5천의 백제군은 10번을 싸워 10번을 다 이기는 선전을 벌였지만 결국 역부족으로 한 번의 싸움에 패하며 그대로 전멸하고 말았었다. 2차세계대전 직전 핀란드와 소련 사이에 벌어진 겨울전쟁에서도 역시 핀란드군은 소련보다도 더 혹독한 겨울을 이용해서 상당한 선전을 펼치며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소련과의 국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굴욕적인 정전협정에 서명해야 했었다. 태평양전쟁에서도 일본군이 아무리 많은 미군의 군함과 전투기들을 파괴해 봐야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양을 계속해서 생산해서 그야말로 쏟아내는 상황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인 것이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우연이 따라주어야 한다. 다른 말로 운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주족의 청이 명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필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의심이 많아서 스스로 도망도 못치고, 황태자를 미리 대피시켜 훗날도 기약하지 못한 채 이자성군에 모든 것을 내주고 스스로 목을 매달고 말았으니 이후 명을 계승하겠다고 일어난 세력들조차 정통성도 명분도 없이 지리멸렬하고 말 뿐이었다.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기회를 노리다가 틈이 보인다 싶을 때 바로 달려들어 급소를 확실하게 찌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약자에게도 강자를 이길 기회가 생기는 것이고, 아니라면 결국 혼자서 힘만 빼다가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이기면 뭣하는가? 워낙 약자라 크게 피해도 주지 못하는 것을.

 

바로 문무일과 윤석열의 차이인 것이다. 문무일이 검찰총장 시절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봐야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만큼 무색무취했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적절하게 때마다 당시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던 검찰개혁의 김을 빼는데는 누구보다 탁월했다. 임기초부터 검찰개혁을 최우선과제로 여기며 추진해 왔던 현정부가 정작 문무일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별반 성과도 없이 시간만 끌고 있었던 이유였다. 정부에서 하자면 다 하겠다고 한다. 정부에서 하라고 하면 다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정작 해놓은 것을 보면 이리 빼고 저리 비틀고 본질이란 간 데 없이 그냥 시늉만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일단은 다 들어주니까. 어찌되었거나 하려는 시늉은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답답해서 윽박지르고 밀어붙여 보려 해도 그만한 빌미도 명분도 거의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당시 정부에서 지금 추미애 장관이 하는 식으로 검찰개혁을 힘으로 밀어붙여 이뤄내려 했다면 지지자 사이에서까지 반발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려 2년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끌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윤설열은 어떤가.

 

분명 모르긴 몰라도 문무일 또한 현정부의 숨통을 끊을 마지막 한 수 정도는 준비해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국 전장관과 관련한 대부분 의혹들은 검찰이 스스로 내사를 통해 확보한 것들이었다. 이보경의 SNS에서도 볼 수 있듯 이미 오래전부터 관련한 내용들을 검찰은 확보하여 가공까지 마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터뜨리지 않았었다. 왜? 아직 때가 아니라 여겼을 테니까. 정부의 임기가 끝나가고 힘이 어느 정도 빠졌을 때, 혹은 그 전이라도 총선 직전에 터뜨려서 정부에 치명상을 입히고 다시는 검찰개혁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만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윤석열이 작년 8월에 일찌감치 조국 전장관의 의혹과 심지어 울산시장선거까지 다 터뜨려 버리는 바람에 정작 총선을 앞두고는 쓸만한 카드가 몇 남지 않게 되었었다. 윤석열도 생각했을 것이다. 이 정도 사안들이면 정부와 여당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상대는 정부란 것이다. 검찰은 행정부의 외청이다.

 

그래서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도 급하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터져나온 것이 채널A의 검언유착이고, 이번 김봉현의 폭로이고, N번방의 오발탄인 것이었다. 한겨레 기자에게 N번방 사건을 보도하도록 사주하여 판을 짜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김어준이 그 의도를 꿰뚫고 멍청한 미래통합당이 받으면서 바로 어그러지고 말았었다. 김어준이 참 큰 일을 한 것이다. 그보다는 너무 성급해서 그림들이 허술했다. 이동재가 이철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어설펐고, 이미 174석에 40%가 넘는 지지율의 여당과 정부를 상대로는 사기꾼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힘이 빠졌으면 역공의 차례다. 그동안 측근들도 다 인사조치되고 혼자 남은 상태에서 그나마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강직한 검사로서의 이미지까지 완전히 부정될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다.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한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러니 검찰개혁은 더욱 필요하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래서 문무일이 윤석열보다 더 위험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굳이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앉힌 이유였을 것이다. 어차피 누가 검찰총장이 되더라도 저항은 있을 것이다. 단지 그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어떻게든 개혁을 늦추고 저지하려 수작을 부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적당하겠는가. 머리가 너무 좋아서도 안되고, 인품이 너무 훌륭해서도 안된다. 설마 윤석열 가족과 관련한 의혹들을 정부나 여당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른 후보들도 거의 비슷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이 성급하게 날뛰기 시작한다면 더 빨리 기회는 열리지 않겠는가. 다만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를 것이고 대통령과 정부 역시 작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검찰개혁만 이루어낼 수 있다면. 조국 전장관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겨레와 경향을 비롯해 모든 언론이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음에도 살아남아 오히려 따박따박 되갚아주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고비만 잘 버티고 넘어가면 반드시 검찰개혁은 이루어진다.

 

한명숙 전총리의 일도, 윤석열 가족과 관련한 의혹도 모르고 그냥 넘어갔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검언유착이 불거지고 검찰이 명분을 상당히 잃은 상황에 인사로 힘까지 다 빼놓자 바로 정부와 여당이 꺼내든 카드가 윤석열의 가족과 관련한 의혹이었다. 김봉현은 사실 얻어걸린 것이다. 그래서 강기정을 칭찬하는 것이다. 강기정이 혹시라도 지인이라고 청와대 밖에서 사적으로 만났으면 없었을 기회다. 그리고 역공의 기회가 만들어진다. 역공이 아니다. 응징이다. 원래 천자의 군대는 침략이 아닌 응징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정벌이라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의 행사인데 그걸 싸움으로 보는 것부터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처사인 것이다.

 

자칭 진보들 피눈물 흘리는 것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자칭 보수는 어차피 윤석열에게 그만한 의리가 없다. 오히려 이명박과 박근혜를 수사해서 잡아 쳐넣은 당사자가 윤석열이었다. 자칭 진보 가운데 배라도 갈라 순절하려는 놈들이 한둘은 나오려나. 대통령을 우습게 봤다. 정확히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준 40%가 넘는 국민들을 너무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지금도 모욕하는 것이겠지만. 세상에 언론이 국민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정도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그 문빠가 국민 전체 가운데 절반 가까이다.

 

문재인식 싸움법이란 것이다. 자잘한 꼼수따위 필요없다. 원칙대로 가도 국민의 지지가 있는 한 정부는 승리한다. 개혁을 간절히 바라는 국민들이 여전히 자신들을 지켜보는 한 정부는 실패할 수 없다. 그러니까 유권자만 천만이 훨씬 넘는 거대한 힘이 문재인 대통령의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땐 그냥 정공만 써도 된다. 아니 정공도 필요없이 그냥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만 해도 된다. 추미애는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아주 궁합이 잘 맞는다.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앞만 보며 한 길로 달려가는 캐릭터도 그리 흔치 않다. 자기가 그 힘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누군가 그 힘을 가지고 뒤를 받쳐준다면 누구보다 용맹하고 지혜로울 수 있다.

 

상대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보다는 사시 9수가 학생운동 할 것 다 하고 옥중에서 합격한 사람과 맞서려 한 자체가 주제넘는 것이었다. 수가 다르다. 그동안 견뎌 온 세월이 다르다. 특수통으로 누릴 것 다 누리며 살아온 사람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부러 인고의 길을 걸어온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와서 윤석열이라 다행이라고나 할까. 조국 전장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가족들에게도. 희생 없이 전진은 없다. 참 긴 시간이었다.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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