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靺鞨의 중고대 중국어 발음은 대충 무앝핱 정도가 될 것이다. 물길勿吉은 미웉깉으로 읽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일단 남아 있는 사료만 보더라도 말갈을 모두 하나의 부류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특히 만주 서부에 거주하던 백산말갈과 속말말갈에 비해 흑수말갈은 발해가 건국된 이후로도 상당한 이질성을 유지하며 긴장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흉노나, 몽고, 선비의 예를 보더라도 여러 계통의 다양한 부류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 시도가 이전부터도 매우 흔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말갈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고려 이후 한반도에 존재했던 이질적 천민집단을 부르던 무자리란 것이다.

 

흔히 대표적으로 화척이라 불리는 그들은 혹은 수척, 혹은 양수척이라 불렸으며 이두식으로 무자리라 번역되고는 있다. 그리고 이들 무자리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주로 도축과 피혁가공, 버들고리가공, 수렵 등 한반도의 주류인 정착농경인과 상반되는 특징을 매우 강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차라리 만주에 살던 만주족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실제 조선 중기까지도 이들은 한반도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이질성을 유지하며 한반도 정부의 지배에 저항하다가 결국 천민으로 그 신분이 고착되고 있었다. 화척을 굳이 일반 백성을 뜻하는 백정이라 부르면서까지 조선에 동화시키고자 했던 조선조정의 노력이 결국 백정을 천민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끝나고 만 것도 그런 고칠 수 없는 이들 집단의 이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했더니 견디지 못하고 곳곳에서 살인에 강도에, 심지어 무리를 지어 약탈까지 일삼았다. 임꺽정이 그런 가운데 전국구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는 상당히 일찍 하나의 집단으로 동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최소한 신라의 지배집단이 이들 피정복민인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차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들 사이에 이질성으로 인해 분란이 일어났다는 기록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후고구려라 했지만 궁예의 세력에는 신라의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후백제라 이름한 견훤 역시 후기신라의 군벌을 기반으로 발호한 집단이었다. 고려말 신라의 부흥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아다시피 그냥 흐지부지 진압되고 마는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이미 신라 하대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한 무자리는 심지어 일제강점기까지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조선사회와 겉돌고 있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결국 서로 언어와 문화에서 일정 정도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서로 동질성을 느낄 정도의 공통점은 있었을 것이란 점과, 더불어 아직 야만상태에 있었던 이민족들과 다른 문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결국 문명화된 삼국은 문화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문명 이외의 것이라 치부할 정도의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신라의 지배가 이전 지배층의 지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차이가 없다면 굳이 거스를 필요가 없으니 동화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생존에 이익이 된다. 그런데 무자리는 한반도의 그런 보편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착할 수 없었다. 태종이 그렇게 무자리들을 모아 한 곳에 정착시켜 농사를 지으며 살도록 만들고자 노력했음에도 그들은 끝내 주변의 농민들과 싸움을 일으키고 정착지를 떠나 곳곳을 떠돌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반도의 집시가 되었다. 내가 무자리에 대해 알면서 떠올린 집단이 바로 집시였다. 남사당의 기원도 바로 이들 무자리였다. 무자리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순종적이지 않은 무자리들로부터 여자들을 빼앗아 관기로 삼았었는데 이때 여자 없이 떠돌던 무자리들이 남사당이란 이름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남사당이 곡예를 보이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버들고리를 짜고, 가죽제품을 팔고, 혹은 도축과 수렵으로 조선의 일반백성이 꺼리는 일을 대신하면서 그들은 조선사회의 경계에서 조선인의 밖에 존재하며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그리고 무자리들 자신도, 조선백성 누구도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무리라 여기지 않았었다. 그런 적개심은 신분적인 차별로 발전해서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첫째 생각하는 것은 삼국시대 삼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만큼 한반도 북부에서 이후 이주한 무자리들의 이질성은 생각한 이상으로 컸었다. 무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 만큼. 그래서 무자리들, 정확히 말갈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타칭설을 지지하는 이유다. 바로 조선사회에서 백정이라, 혹은 이전 고려에서 화척이나 양수척을 대하던 당시 한반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화가 되어 있던 삼국인들이 문명화가 되지 않은 주변의 이민족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 말갈이 아니었을까. 시작은 자칭이었을지 몰라도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그냥 말갈이 그들을 아우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를테면 만주족이든 몽골족이든 타타르족이든 죄다 뭉뚱그려 오랑캐라 부르던 것처럼. 여진이든 한족이든 화척 출신이든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해적은 일단 왜구라 부르고 본다. 그래서 미추왕 때 고작 경주 인근이나 지배하던 말갈이 왕성까지 쳐들어와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민족으로서의 말갈이 아니라 야만집단을 일컫는 이름으로서의 말갈이다.

 

그러니까 부여 일대에 살던 야만인들은 속말말갈일 테고, 만주 남부에 거주하던 비교적 순종적인 고구려와 이질성이 크지 않던 야만인들은 백산말갈이었을 것이다. 옥저나 동예와의 관계도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흑룡강을 따라 내려온 집단은 검은 물 근처에서 산다 해서 흑수말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과 그래도 같은 한반도에서 아웅다웅하는 문명인인 자신들은 다르다. 다만 여기서 또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좀 배우고 가졌다는 놈들은 식민지 조선의 무지렁이 백성들이 아닌 일본의 지배자들과 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혈연적으로는 속말이나 백산과 더 가까우면서도 문명적으로 고구려 지배자들 입장에서 신라가 더 가깝게 여겨졌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야만인인 말갈과 동류로 남기보다 신라에 동화되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튼 나로서는 말갈과 만주족과의 연관성을 하나의 민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나바호와 코만치가 다른 것처럼, 오환족과 탁발부의 선비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처럼, 말갈이라는 이름 안에 서로 다양한 이질적 집단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의 차이보다 더 작았다. 그나마 그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것이 고구려였을 텐데,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조차도 너무나 쉽게 짧은 시간 안에 고려사회에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직 말갈만이 한반도 사회에서 겉돌았던 것이었고. 그만큼 말갈과 한반도인 사이에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정체성의 간극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냥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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