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굴복시키고 일약 천하인으로서 관백의 자리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전국시대 일본에서 가장 최대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모리가였다. 모리가 120만석에 분가나 다름없던 고바야카와 깃카와가 도합 50만석, 여기에 모리가를 맹주로 여기고 따르던 서국의 다이묘가 무려 10국에 이르고 있었다. 벌써 오다 노부나가가 죠라쿠에 성공하기 10년도 훨씬 전부터 그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정작 모리가는 단 한 번도 죠라쿠나 쇼군과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었다. 어째서?


하긴 당시 전국의 다이묘 가운데 천하일통이니 천하인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다이묘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가장 먼저 죠락쿠를 시도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조차 자기가 천하인이 되어 혼란스러운 전국의 일본을 통일하겠다는 야심보다는 그저 겐지의 일족으로서 유명무실해진 쿄의 쇼군을 대신하겠다는 단순한 욕심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케다나 호조와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을 등뒤에 두고도 감히 쿄로 전력을 다해 진군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죠라쿠에 성공해서 쇼군을 계승했다고 이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아우를 수 있었을까? 그냥 자기가 쇼군이 되고 모두가 인정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심지어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근대에조차 일본인에게 일본이라는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원래 아이즈인이었다. 그냥 사츠마 출신이었다. 쵸슈의 경계 밖은 한슈의 허락을 받아야만 겨우 나갈 수 있는 외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우리들끼리 걱정없이 잘 살면 된다. 실제 전국시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수많은 토착다이묘들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난세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굳이 다케다여야 할 필요도 없고, 굳이 아사쿠라가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오늘 사이토가 대세라면 사이토를 따르고, 내일 오다가가 대세라면 오다의 편에 선다. 만일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식들 가운데 나누어서 양쪽 편에 모두 서도록 만든다. 세키가하라 싸움 당시에도 사나다 가문의 당주 마사유키는 차남 유키무라와 함께 서군에 속해 있으면서 장남 노부유키는 동군에 합류하도록 했던 것도 그런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의 패권을 누가 가지든 사나다라는 성과 영자를 지킨다. 대부분의 다이묘에게 그것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았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도 다른 다이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군을 상대로 발악에 가까운 기습을 감행해서 무려 다이묘를 살해하는 위업을 이루기까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에서도 흔한 여러 다이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살해하고도 사이토 요시오카를 몰아내고 기후성을 차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다 노부나가도 천하에 대한 포부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만큼 미요시가 장악하고 있던 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고, 쿄까지 지나쳐야 하는 롯가쿠와 아사쿠라의 세력 역시 고만고만한 정도였다. 정작 강적이라 할 만한 다케다와 호조는 훗날 도쿠가와가 되는 마쓰다이라의 너머에, 그리고 우에스기는 다케다의 위에 버티고 있었다. 입지까지도 운이 따라주고 있었다. 요시타쓰의 급사와 요시오카의 어리석음은 오다 노부나가라는 군소영부에게 새로운 야망을 현실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죠라쿠에 성공해서 일왕까지 알현했음에도 정작 오다 노부나가 자신은 겐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것이야 말로 같은 시대 죠라쿠를 꿈꾸던 다른 많은 다이묘들과 오다 노부나가가 결정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겐지라면 얼마든지 쇼군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 자신의 실력만 보이면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얼마든지 쇼군의 계승을 인정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가 죠라쿠로 겨우 손에 넣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위의 다른 다이묘들을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노부나가를 포위하는 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때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넘겨야 했었다. 다른 겐지의 다이묘들과 달리 필사적으로 주위의 다이묘들을 제압하고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같은 이유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충실하게 이어받는다. 만일 이 두 사람이 아닌 겐지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던 이에야스가 처음부터 천하인이 되었다면 일본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처음부터 죠라쿠를 시도하고 쇼군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겐지의 후예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 원래 쇼군-정확히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은 가와치 게인지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동국을 정벌하면서 받았던 관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전구년후삼년의 역이라 일컬어지는 동국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사들의 마음을 얻으며 충성서약같은 것을 받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미나모토의 겐지는 마치 무사들의 우두머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요시이에의 증손 요리토모가 타이라가를 무너뜨리고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세운 뒤부터는 공식적으로 쇼군이란 무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써 쓰이게 되었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 무사들이니 무사들의 왕이 곧 일본의 왕이다. 굳이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아도 무사들만 장악하고 있으면 일본은 곧 쇼군의 지배 아래 들어온다. 중세 이후 일본의 정치를 특정짓는 정의였다.


원래 겐지라는 자체가 동국에 연고를 두고 있었으므로 서국과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서국에는 다이라씨가 있었지만 미나모토씨에 의해 철저히 몰락하면서 서국을 대표할만한 이름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에도시대까지 서국은 마치 별개의 존재인 양 중앙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따로 움직여 온 경향이 강했었다. 아무래도 쇼군이라는 이름에 얽매이기 쉬운 동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성도 더 강했던 것이다. 굳이 힘을 소모해가며 죠라쿠를 할 이유도 없었고, 성공해도 돌아올 실익이 없었다. 죠라쿠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겪어야 했던 위기들을 돌아볼 때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오다 노부나가 역시 수많은 역사의 패배자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렸을 수도 있다. 당장 서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모리 모토나리가 선택한 서국 10국의 맹주라는 형식부터 천하인이라는 야심과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마저 끝내 쇼군도 되지 못하고, 쿠게마저 호소카와에 거절당한 탓에 토요토미의 성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토요토미의 가신들이 분열했던 이유 역시 토요토미가 겐지가 아닌 쿠게의 이름이었다는 이유도 적지 않았고 보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싸움만 아니었다면.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패권에는 사실 운도 상당히 따랐었다. 당장 죠라쿠를 위해 미카와를 거쳐 진격하던 다케다 신겐이 그만 급사한 것도 그 하나였다. 그 전에 이미 다케다가는 그 힘의 근원이던 금광이 고갈되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만일 다케다 신겐의 사후 후계문제로 다케다가의 내정이 혼란스럽지 않았더라면 나가시노에서 가쓰요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한참 더 훗날의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역시 쇼군의 요청에 따라 죠라쿠를 시도하던 우에스기 겐신이 진중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도 역시 오다 노구나가의 패권을 도운 행운 가운데 하나였다. 우에스기 겐신이 죽고 양아들 카게카쓰가 뒤를 잇고 나서도 여전히 우에스기는 강적으로 다키가와와 시바타 모두를 고전케 만들고 있었다. 호조와 모리마저 오다 노부나가에 적대했다면 오다가의 운명도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남은 고만고만한 적들을 상대로도 상당히 고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였다. 아네가와강의 전투에서는 미카와군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자칫 패할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테지만 말이다.


사실 세키가하라 싸움 당시도 정작 패하기는 했지만 모리가가 속해 있던 서군 쪽이 동군에 비해 그다지 열세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서군 가운데 고바야카와나 깃카와 같은 배신자들이 나타나며 지리멸렬하여 와해된 것이었지 전력으로 동군이 서군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서군에 포함된 다이묘 가운데 상당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다 상당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이들이었다. 거의 절반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고 보면 된다. 잃은 병력 만큼 막대한 물자 역시 잃고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가 세키가하라 싸움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큐슈의 패자인 시마즈도 소극적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열심인 것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오타니 정도였다. 괜히 일본에서저 이순신이 도쿠가와 바쿠후의 일등 공신이라 말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서국의 무장들이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결국 졌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신들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외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다. 모든 평가는 승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전국시대 일본 역사의 중심은 결국 승리한 동국에 있었다.


단순히 동국의 무장들이 더 강해서 동국이 전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살아있을 때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중앙정치에 소극적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특히 서국의 다이묘들에게 많은 희생과 손실을 강요했다. 무능해서 이순신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함경도에서 정문부에게 패하고 쫓겨났다. 졌기에 무능한 거지 무능해서 진 것은 아니다. 결과로 모든 것을 계량한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다이묘들은 각각 독립된 영지를 다스리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근대까지도 일본이란 원래 생소한 개념이었다. 통일이라기보다는 정복이었고 복속이었다. 오로지 겐지만이 쇼군이 될 수 있었다. 오다와 토요토미조차 겐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사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유가 달랐고 목적이 달랐다. 그리고 겪은 환경까지 달랐다. 역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임진왜란. 토요토미의 야망은 정작 자신의 편에 선 다이묘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남겼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별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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