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생리와 안전, 소속, 인정, 자아실현 다섯단계로 나누었었다. 일단 먹고 자고 입고 싸는 문제가 해결되고, 어디 가서도 죽거나 다칠 일이 없다는 안도가 생겼을 때 자신의 소속을 찾고, 주위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면 놀이는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노래하고 논다고 밥이나 옷이 생기지는 않는다. 춤추고 게임을 한다고 맹수로부터 자신이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롤을 하다 보니 롤 팀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노래 못한다고 타박듣고, 연기 못한다고 놀림거리가 되면서도 끝내 그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다는 행위에 있어 과연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옳은 것인가.

 

놀다가 죽었으니 추모할 가치가 없다. 놀러 가서 죽었으니 죽음에 의미를 둘 이유가 없다. 세월호 때도 나온 이야기다. 먹고 살만해지고, 주위에 다른 위험도 없어서 안전도 확보했고, 있을 곳이 있고, 인정도 받게 되었으니 놀기도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목숨걸고 번지점프 하고 스카이다이빙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그들의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놀이가 된다. 자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만이 아니다. 유희를 즐기는 대부분 동물들이 바로 저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상태에서 놀이라는 것을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배고픈 고양이가 집고양이처럼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천적이 주변에 있는데 마음놓고 놀 수 있는 것은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새끼고양이 정도다. 그런데 놀러 가서 죽었으니 죽어도 싸다. 대한민국이란 고작 그런 정도의 사회인가?

 

더 웃긴 건 일하다가 죽으면 또 일하다 죽었다고 조롱하는 놈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거의 같은 놈들이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안해서 그런 데서 일하다 죽었다. 학교 다닐 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그런 정도 조건에서 일하는 것도 적절한 징벌일 수 있다. 그로 인해 기업이 돈 벌고 나라경제가 좋아지만 의미있는 희생일 수 있다. 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다가 죽은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지 누가 추모할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에 대한 자칭 보수의 일관된 태도였다. 특히 그들과 비슷한 또래의 2030들에게서 그런 반응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현재 한국 2030의 사고방식은 7080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인간을 개 좆으로 여긴다. 자기들이 개좆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모들도 아마 그놈들을 개좆으로 여기며 길렀겠지. 그러니 저런 괴물이 만들어진다. 저런 괴물 언론과 괴물 정부와 괴물 국민들이 만들어진다. 놀다 죽었으니 슬퍼할 이유도 없다.

 

그러라고 나라가 있는 것이다. 마음놓고 놀라고 나라가 있는 것이고, 그럴 수 있도록 경제도 발전시키고, 사회도 고도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전제를 부정한다. 노는 사람들은 안전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누가 안전해야 하는가? 일하는 사람? 같은 입으로 하는 말이란 게 더 역겨워지는 이유다. 더러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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