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에서 -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가장 필수적인 생산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인력을 보유하고 바로 동원할 수 있는가에 따라 생산할 수 있는 가치 역시 결정되고 있었다. 더 많은 인력을 보유하고 동원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다. 생산은 곧 부이고 힘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와 힘을 자기 혼자 독점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아직 생산기술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더욱 인간의 노동력에 기대어 생산이란 걸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소유한다. 노동력을 소유한다. 굳이 노예제가 아니더라도 고대의 정치제도란 전제적인 군주나 소수의 지배신분이 보다 다수의 생산에 종사할 수 있는 노동력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대 크레타에서는 그래서 아예 군주의 명령 아래 모든 백성들이 노동에 종사하고 생산한 것을 바친 다음 나누어받는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세금이라는 것도 피지배신분의 필요나 요구와는 상관없이 지배신분의 일방적인 입장에 의해 결정되고 강요되는 것으로 아주 최근까지도 단지 지배신분의 사유재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백성이란 다름아닌 군주를 위해 일하고 생산하며 세금을 바치는 수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계기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산의 증가였다. 인간보다는 그 인간을 투입할 사업장 - 곧 농경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언제라도 필요한 노동력을 바로 생산에 투입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토지에 묶어두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뜻밖에 노예의 해방과 봉건질서의 확장은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갖는다.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지방권력의 강화와 권력의 분화는 생산수단으로서 개인에 예속된 노예보다 농지에 예속된 농노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농노란 토지를 소유한 지방의 영주에게 자신이 소유한 유력한 수단이자 자원이 된다. 자신이 지배하는 작은 나라의 백성이기도 하다.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철저히 토지에 예속된 채 생산을 위한, 유사시에는 무력으로도 동원되는 수단으로서만 그들은 존재했다. 그것이 확장된 것이 바로 근대 국민국가라고 하는 개념이다.


농노들이 토지에 예속되었다면 국민들은 국가에 귀속된다. 국경이 경계가 되어 개인의 이동과 행동을 제약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축구를 잘해서 국적을 브라질로만 바꾸면 바로 대표팀이 되어 월드컵 우승을 바라볼 수 있다 하더라도 태어난 나라가 한국이면 한국 대표팀에서 뛰어야 한다. 아무리 일본문화를 동경해서 일본에서 살려고 해도 하다못해 사는 곳을 바꾸는 것만도 상당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들을 필요로 한다. 더 나은 조건에서 살고 싶은데 그러나 당장 자신의 국적이 걸린다. 자신이 속한 나라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며, 군인으로 동원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만으로 국부에 영향을 준다.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여서 인구를 늘리려는 각국의 시도는 노예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번식을 강요하던 전근대의 노예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 역시 중요한 수단이다. 생산수단이 다양해진 만큼 국가에 속한 여러 생산수단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국민이라고 하는 노동력 자체다. 대신 국가라는 틀 안에서 개인은 나름대로 안전을 보장받으며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도 하다. 농노들도 영주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영주의 보호를 받으며 최대한 자신들의 관습대로 자유를 누릴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조선사회에서는 개인에 인신을 예속하는 노비제가 아주 늦게까지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었는가. 첫째는 농업생산성이 너무 떨어졌다. 농사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다. 기후가 온난한 것도 아니고, 사시사철 비가 충분히 내리는 것도 아니고, 땅이 특별히 비옥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너무 일찍 중앙집권이 완료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미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였고 지방 호족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고려든 조선이든 호족의 토지소유를 제한한 제도 아래서 지배신분이 충분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다수의 노동력을 소유하여 토지경작을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사유재산이 일반화된 조선후기에 이르면 소유주 개인이 아닌 토지에 예속된 외거노비가 크게 늘어나고 있기도 했었다. 충분히 토지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면 굳이 노비를 자신의 소유로 같은 집에 두고 함께 살기보다 떨어뜨려놓고 소유한 농지에서 일하도록 시키는 쪽이 더 유리하다. 나중 가면 소작농과 외거노비의 구분조차 모호해진다. 조선후기 증가한 전호들은 사실상 다수의 소작농을 거느린 봉건영주에 가까웠다.


다시 말히 인신의 예속방식의 차이였던 것이다. 소유주 개인에게 예속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인 토지에 예속시키는가. 그리고 나아가 국가에 예속시키는가. 광종과 태종의 노비해방 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산수단인 노비를 사대부가 아닌 국가가 소유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국가의 권력독점에 저항하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비의 개인예속을 긍정한다. 사대부들이 노비소유를 필수로 여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노비를 소유해야만 사대부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노비를 잃으면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수단을 잃게 된다. 


정치제도의 변화는 따라서 인신의 예속방식의 변화로 단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산수단인 개인을 예속시킬 것인가에 따라 이념이 나뉘고 체제가 갈린다. 바로 그것이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정의한다는 마르크스 명제의 진짜 뜻일 것이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인신의 예속방식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결국 정치제도와 이념 사상까지 변화시키게 된다. 인권이란 개념마저 사실은 역사의 경험적 결과일 뿐 선험적 가치는 아닌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결국 생산의 가치와 동일시된다. 한 개인이 생산하는 가치의 양과 질이 어떤가에 따라 개인의 가치 역시 결정된다. 개인이 생산할 수 있는 가치가 보잘 것 없을 때 개인을 상실할 경우의 손실 역시 그만큼 작을 수밖에 없다. 개인을 잃는 것이 자신에게도 큰 타격이 될 때 개인을 대하는데 더 조심스러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사회는 결국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것들만 달라졌을 뿐이다. 역사가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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