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법이나 제도를 바꾸려면 상식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 번에 뒤엎는 것, 다른 하나는 점진적으로 바꿔가는 것. 이를테면 사형제 폐지같은 경우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전에 입법주체들의 합의에 의해 전격적으로 결정된 경향이 강하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사형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여론이 많기에 행정부의 자의로 사형집행을 중단함으로써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이 되어 있는 상태다. 구성원들의 의식이 따라오기 전에 옳다고 여기고 필요하다 여기기에 먼저 바꾸고 난 뒤 이해와 동의를 얻는 과정을 밟는다.


두 번 째는 당연히 완전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기까지 조금씩 이해를 구하며 타협을 통해 당장 가능한 범위에서 천천히 온건하게 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시끄러운 인종문제라든가, 세계적인 이슈인 여성문제 등이 이런 범위에 속한다. 아니 오히려 역사적으로도 더 많은 개혁이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장 조선의 대동법도 그렇게 토론과 협의를 통해 여러 주체들이 서로 타협하며 제도의 도입과 확산이 백 여 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일 낙태죄를 폐지하게 된다면 의회를 통해 한 번에 폐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여소야대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당장 행정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의식의 변화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점진적인 변화를 주도해 갈 것인가.


조국 수석이 낙태죄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교황의 서신을 인용한 것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낙태죄 폐지의 여론이 전국적으로 더 높기는 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종교 등 보수적인 사회 일각에서의 반발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황이다. 사회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하다. 당장 낙태죄 자체를 폐지할 수 없다면 그같은 점진적인 타협을 통한 대안은 무엇일 것인가? 결국 교황이 말한 그대로 낙태를 하는 여성들에 대한 용서이고 자비이기 쉽다. 연민이며 동정일 수밖에 없다. 낙태는 죄이지만 그렇다고 낙태를 행한 여성을 영원한 고통속에 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낙태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여성들이 너무 큰 고통을 겪지 않도록 사회가 합의하여 보호해주어야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낙태죄 자체가 아예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균형점이라는 것이다. 더이상 가톨릭의 교리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변화하는대로 가톨릭 역시 유연하게 변화하는 세상과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종교계만이 아니다. 여성계를 향한 주문이기도 하다. 진보진영에 대한 주문이기도 할 것이다. 당장 조국 자신이 강경한 낙태죄폐지론자다. 종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할 필요 없이 당장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다. 그럼에도 온건하게 신중하게 낙태죄에 대해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낙태죄 폐지가 아닌 사회적 합의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과연 조국 수석의 인용이 잘못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당장은 죄임을 인정하더라도 굳이 적극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소극적으로 조건을 달아 처벌 자체를 유예하거나 면제한다. 낙태 자체는 잘못으로 인정하고 남겨두더라도 그것이 더이상 여성의 삶에 불이익으로 고통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배려한다. 낙태죄로 인한 고소인의 상당수가 남성이라고 한다. 낙태죄가 여성을 더욱 궁지로 모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정작 임신의 책임은 남성들에게도 있음에도 낙태로 인한 책임은 여성들만이 거의 일방적으로 짊어지는 현실이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거기까지라면.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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