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짜르가 인민의 어버이로 불렸던 것은 그가 계몽군주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유럽의 군주란 것은 대부분 백성들과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었다. 당연한 것이 백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남의 나라 귀족들이 자기들만의 사정에 따라 왕이 되었다 때로 내쫓기기도 하는 것이 유럽의 왕조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웨덴의 경우는 나폴레옹의 원수 중 하나였던 베르나도트가 배신의 대가로 스웨덴의 왕위를 세습하고 있는 중이다. 왕들도 그렇고 백성들도 그렇고 그저 세금이나 거둬가는 지배자이고 세금을 거둬들여야 하는 피지배자일 뿐 그 이상 어떤 유대관계도 없었다. 그러다가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로부터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국가체제가 수입되면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왕과 백성은 둘이 아니며 부모와 자식처럼 보살피고 의지하는 관계다. 그러니 백성들이여 내게 복종하라.

 

계몽군주의 등장은 그래서 국민국가의 등장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의 등장은 절대왕정의 발전과 관계가 깊다. 즉 국가란 왕과 귀족에 의한 지배구조가 아닌 왕과 귀족과 백성 모두를 아우르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왕을 정점으로 모든 백성들은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나누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왕은 최고의 국민이자 시민이자 종복으로서 가장 큰 책임과 의무 만큼 가장 존엄한 권위와 권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어버이다. 왕이란 곧 백성들의 부모다. 백성들은 국왕의 자식으로 국왕을 위해 자신이 속한 국가에 헌신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뭔 말이냐면 계몽군주란 곧 어버이 수령과 같은 뜻이란 것이다. 원래부터 그랬었다. 어버이 수령이랍시고 오만 데 안 가는 곳 없이 다 싸돌아다니며 별 되도 않는 참견까지 있는대로 해대고 있다. 그래서 김정은과 김정일의 차이는?

 

김정은을 자꾸 계몽군주라 부르는 유시민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유시민 쯤 되면 계몽군주라는 게 그렇게 좋기만 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국민들을 위해 병원을 짓겠다고 고리대금으로 또다른 국민인 여성들을 매춘부로 전락시켜 다른 주머니를 채우던 놈들이 바로 계몽군주란 것들이다. 한 편에서는 부국강병하겠다고 자본가들과 결탁해서 국민들을 착취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렇게 착취한 돈으로 보기 좋으라고 돈이며 식량이며 나눠주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닮았네? 그러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계몽군주가 아니었다는 뜻일까? 아마 계몽군주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나오는 인식의 간극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김정은은 계몽군주인 것일까? 내가 이해한 바로는 김일성도 김정일도 계몽군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북한 역시 근대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한 나라라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 보자면 계몽군주란 절대 칭찬이 아닐 테지만, 더구나 근대적인 국가의 지도자로서 계몽군주라 불린다면 차라리 모욕이라고 칼들고 날뛰어야 정상이란 것이다. 과연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3대가 북한 국민 전체를 위한 국가지도자들이었는가 묻는다면 물론 아니라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원래 국민국가라고 구성원 모두를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란 것이다. 한 나라 안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고 계몽군주라도 국민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도 대표적인 다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북한 주민을 보살피고 이끄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역대 북한의 최고권력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유시민은 과연 무슨 뜻으로 계몽군주란 표현을 쓴 것인가. 동의할 수 없을 때도 때로 아주 자주 있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김정은이 계몽군주라?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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