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입장이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내가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어째서 그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 주의깊게 따져본다. 이해와 용서는 다른 것이다. 이해와 인정 역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서 판단한다. 평가한다. 과연 어떠한가.


물론 실제 많은 불편함들은 그같은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론들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려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또한 이해의 하나다. 다만 때로 그런 수준을 넘어선 - 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편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러는가?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들을 하는가? 저런 모습으로 있는가?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들인 경우도 많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 각자가 놓인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런 서로 다른 판단들이 서로 다른 개성을 만들어낸다. 원래 그 사람은 그런 때 그런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구나.


일상생활에서야 사실 거의 문제될 것이 없다.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딱 그 만큼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 서로의 관계를 해치지 않을 만큼. 서로의 관계를 해침으로써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래서 한 편으로 현실에서의 이해라는 것도 서로에게 가해지는 영향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권력에 비례한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해야지 부모가 자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고용인이 사용자를 이해해야자 사용자가 고용인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 안그래도 상관없으니까.


굳이 내가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오히려 자신에 맞춰서 말과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권력관계다. 부모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을 때릴 수 있다. 자식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모를 때릴 수는 없다. 사용자 역시 그냥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용인을 해고하여 내보내면 그만이다. 고용인이 사용자를 내보낼 수는 없다. 하물며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대상이란 굳이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아무릴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개 인터넷 등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란 바로 그같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대상들에 대한 것이다. 굳이 자기가 상대에게, 혹은 상대를 자기에게, 그렇게 상대를 내면화하여 이해하려는 수고 자체가 번거롭고 수고스럽다. 어차피 타인이다. 어차피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판단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보기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단정짓는다. 내가 불편하니 너는 잘못되었다.


아주 오래전일이다. 박재범이 어느 SNS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전문가들이 그 글의 내용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해석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박재범을 불편하게 여기던 네티즌 가운데는 그럼에도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아야 하는가'며 반발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타진요의 경우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단지 타블로를 위해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들은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런 행동들을 하는가. 그런 모습들을 하고 있는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니다. 타인이다. 타자다. 객체다. 대상으로서 단지 자기 안에 있는 이미지만을 투사하여 객관화한다. 보편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에 대한 자각조차 없다.


하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배운다. 보편의 인간도 아니고, 불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도 아니다. 직접적인 관계 아래 모든 것이 놓인다. 그를 통해서만 인정된다. 아직 인정이 지배하는 사회다. 인정이란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다. 주고 받는다. 받고 준다. 그런데 전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없다. 타인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다. 남에게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나에게 직접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 없기에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될 지 굳이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상대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한다.


더구나 대상이 오히려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연예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제 거리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해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에게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무례가 저질러진다.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나마 인터넷이다.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연예인은 가장 만만하고 편리한 대상이다.


아직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외의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원시사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외의 것들에 대해 상상할 능력이 결여되었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같은 인간으로서 대상을 존중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의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설사 불편한 것이 있더라도 상대를 위해 자신이 그만한 불편조차 참아내지 못한다. 그만한 배려조차 베풀 여유가 없다. 그럴 이유가 없다.


어쩌면 분노일 수 있다. 증오일 수도 있다. 애써 자신과 분리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다. 갈 곳을 잃은 자신의 감정을 굳이 거리끼지 않아도 되는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투사한다. 그만큼 불만도 많고 그 불만을 해결할 어떤 수단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상대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를 대신하여 투사하고자 한다.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를 비난함으로써 잠시의 통쾌함을 얻는다.


이미 대중은 권력이다. 인터넷은 대중을 조직화하고 대중의 의지를 구체화시켰다. 단일한 목적과 이해가 그들을 '우리'로 만든다. 대중을 거슬렀으므로 그들의 잘못이다. 대중에 밉보였으므로 그들이 잘못한 것이다. 결집한 대중의 힘이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대중이 항상 옳다. 서로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한다. 단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로 뭉친다. 자신들이 정의다.


한 걸음만 다가서면 된다. 한 걸음만 자기에게로 데려오면 된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살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다. 굳이 문제삼을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 정도 수고도 자기는 번거롭다. 그것이 더 불편하다. 오만이다. 알량한 우위에 도취된다. 저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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