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에서 같은 인간을 노예로 부린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대사회에서 대부분의 농지와 농산물은 지배자 개인의 소유였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인 농민을 부려서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거둔 뒤 이를 개인들에 분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고자 했다.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였기에 개인에게 농지와 농산물을 소유케 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보다 그쪽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세금을 가두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특수한 전사계급을 만들고 그를 위해 생산을 담당할 또다른 신분을 만들었다. 그렇게 게르만의 전사집단은 중세의 봉건귀족이 되었으며,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지자무라이들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다이묘로 성장해갔다. 농민들과 같이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외부의 침략이 있거나 혹은 약탈할 필요가 생기면 스스로 무장하고 선두에 서서 싸움을 주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확보한 지배력이 이후 신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이 늘고 사회의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더이상 그와 같은 분업이 필요없게 되었을 때 당연하게 신분의 질서도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몇 번이나 사회구조가 파괴되었던 중국에서 더이상 이전과 같은 신분제도가 유지되지 못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구성원을 지켜줄 수 있을 때 사회의 구조는 의미를 갖는다. 그를 위해 개인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나 통제, 강제도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이었다. 그에 동의했기에 심지어 농민이나 천민들조차 그같은 사회적 구조에 순응하며 불이익과 불편을 감수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노예일 때가 더 나았다. 차라리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을 때가 혁명이 일어난 이후보다 더 좋았다. 인간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같은 관성이 곧 사회의 구조이며 신분의 질서이며 또한 보편의 정의이고 가치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리주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는 차라리 지금 다수에 대한 억압과 수탈과 지배가 더 현명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국가가 아니었다. 단위였다. 마을 하나였고, 읍락 하나였으며, 도시 하나였고, 지역 하나였다. 그러다가 조금씩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어느새 국가가 되었고, 하나의 영역이 되었고, 나아가 세계가 되고 인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의 연합인 국제연합은 복잡하고 성가신 절차를 통해서라도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강제력이 없다면 세계니 국제니 인류니 하는 것도 다 의미가 없다. 

 

물론 반대주장도 있다. 개인이 더 소중하다. 그 어떤 당위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있는 자들은 마음껏 돈을 쓸 수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는 자들 또한 마음껏 권력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억압하는 권력의 존재란 용납되지 않는다. 자칭 진보가 그동안 코로나 방역과 시민의 안전을 위한 민주당 정부의 통제와 강제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유였다. 더불어 지금 정부에서의 사실상 방임에 가까운 행태에 침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큰 사고와 피해를 막기 위한 정부 차원의 통제를 비판하던 자칭 진보가 10.29 참사에 대해서는 단지 추모에 대해서만 문제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시민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것은 옳다. 단, 비국민인 민주시민들의 촛불집회는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차단하는 것이 정의롭다. 2030의 가치이기도 하다.

 

말한 바 있을 것이다. 2030의 자유는 자유의지주의의 자유다. 공동체도 없고, 당연히 공공도 집단도 사회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방임의 자유다. 부동산투기도 자유다. 방역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들은 투쟁한 것이었다. 안전을 위한 통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들은 싸워 온 것이었다. 그래서 10.29 참사에도 그들은 정부의 무책임을 비판하기보다 그런 비판을 하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무리한 요구와 주장을 비판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누가 그들더러 그곳에 가라 했는가. 죽은 건 불쌍하지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2030과 7080은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근저에 깔린 사고가 상당히 다르다. 7080에게 개인이란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객체다. 2030에게 개인이란 국가와 분리된 객체다. 둘 다 객체인 것은 같다. 더불어 둘 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 또한 같다. 국가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도 되는 것 또한 공통된다. 나와 상관만 없다면. 그러니까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아니 그래서 노인들은 강요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자칭 진보가 10.29 참사에 대해서는 이전 정부와 달리 조용하기만 한가. 정부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정부에 어떤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는 정부와 사용자와의 협상이 아닌 노동자 개인의 각자도생 - 즉 노조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동체가 사라진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란 어떤 의미일까? 정의당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끔찍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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