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는 대개 둘로 나뉜다. 그리고 그 경계는 거의 평가자의 소속에 따라 정해지고 있었다. 즉 위에 속한 이들은 강유를 호평한 반면 촉에 속한 이들은 강유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다. 어째서인가?


이를테면 강유가 끝내 북벌의 의지를 꺾어야 했던 단곡에서의 패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촉군은 1만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말이 1만이지 당시 촉한의 인구가 100만 좀 넘는 정도였으니 인구의 1%가 한 번의 싸움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 한창 일할 나이의 장정들이었을 테니 그로 인한 생산의 손실과 남은 가족과 친인, 지인들의 동요까지 생각하면 나라의 기반이 흔들릴 패전인 것이다. 간단히 지금 대한민국이 전쟁을 벌여 한 번의 싸움에 50만이 죽었다고 가정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단곡에서만 패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승리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아주 희생이 없을 수 없었다. 싸움하는데 들어가는 물자만 해도 상당했다. 쌀이 게임에서처럼 거저 전선에 있는 강유군에게까지 가는 것이 아니다. 무기도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돈이고 백성의 노력이다. 그런데도 정작 얻은 것은 그리 크지 못하다. 아니 어쩌면 제갈량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그동안의 싸움으로 소모한 것들을 대신하지 못했다. 위군의 입장에서야 그저 자신들과 싸우던 강유만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강유는 비의에 의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자체를 크게 제한받고 있었다. 1만 이상을 동원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에서 무려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촉한의 인구가 100만이라면 거의 10%에 이르는 병력이다. 대한민국 인구로 비교하자면 무려 500만이 병사로 동원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소모된 물자와 백성의 노동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데도 동요 한 번 없었다. 제갈량이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촉한 내부에서 그로 인한 소요가 일었던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될까?


노성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에 패하여 1만이 죽었다는 기록을 믿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강유가 단곡에서 잃은 병력이 바로 1만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병사 1만은 그냥 머릿수 1만이 아니다. 노동력이며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고, 지인이다. 사회 내부에서 동요가 없을 수 없다. 아무리 승상이고 만인지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노성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바로 이듬해 다시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고 있었다. 진짜로 1만의 병력을 잃었는데도 그렇게 쉽게 다시 더 많은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서도 전혀 아무런 내부의 동요나 반발도 없을 수 있었을까? 놀라운 것이다. 결국 5차 북벌에서도 실패하고 죽어서 돌아온 제갈량에 대해서조차 촉한의 백성들은 그를 경모해마지 않았다.


제갈량을 감히 역사상 명재상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관중과 비견하고 심지어 소하보다 윗줄에 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5차례의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제갈량이 동원한 병력이 최소 8만이었다. 인구의 거의 10%를 전쟁에 동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촉의 내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백성들의 삶도 나아지면 나아졌지 못해지지 않았다.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이 50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벌인다 생각해 보라. 그러고서도 아무런 원망도 비난도 듣지 않았다.


더불어 강유와 제갈량은 군지휘관으로서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는데, 과연 북방출신 답게 강유는 과감한 기동과 기만을 통한 결전에 능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기면 크게 이기고 지켠 또 크게 졌다. 반면 제갈량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전략을 써왔는데 그래서 이겨도 크게 이기는 법이 없는 대신 크게 지지도 않았다. 이위공문대에서 이위공 이정이 이에 대해 평가한 말이 있다. 뛰어난 지휘관은 크게 이기는 지휘관이 아니라 크게 지지 않는 지휘관이다. 언제든 안정적으로 최선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전장을 지켜낸다.


제갈량의 군재를 폄하하는 이들은 바로 강유와 같은 군재를 더 높이 살 것이다. 하지만 현대전에서도 군사령관쯤 되면 전술적역량보다 군정의 실력이 더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군을 어떻게 편제하고, 보급 및 운용은 어떻게 하고, 인사는 또 어떻게 하고. 그리고 그런 사령관 아래서 일선지휘관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다. 군을 이끄는 것은 제갈량이지만 실제 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야전지휘관들이다.


최소한 제갈량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오면 위군 가운데 감히 제갈량과 정면으로 싸우려는 이들이 드물었다. 사마의도 그래서 노성에서 제갈량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가 무려 3천에 이르는 수급만을 헌납하고 돌아갔다. 수급이 3천이면 실제 피해는 그 몇 배에 이른다 보는 것이 옳다. 죽인 족족 수급을 베어 얻을 수 있기란 원래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때문이다. 노획한 갑옷만 무려 5천 벌이었다.


아무튼 알면 알수록 어째서 제갈량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상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가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또한 이후 수백년간 중국의 대기병전술의 뿌리가 될 팔진도까지 고안해냈다.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에서 쓰인 검차가 바로 그 영향이다. 사람의 재주가 하늘의 때만 못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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