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향일보 조간 1면 타이틀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박원순 시장의 실종 소식이었다. 물론 한 발 늦은 기사다. 벌써 몇 시간 전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속보가 떴으니. 종이매체의 한계다. 일단 인쇄해서 배포까지 끝난 신문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경향일보의 1면과 박원순 시장의 시신발견 소식에 바로 떠오른 인물이 안희정 전지사였었다. 성인지감수성을 앞세워 법원의 판결까지 압박하고, 심지어는 모친상에 조문하는 것까지 날세워 비난을 쏟아낸다. 비판이 아니다. 비난이다. 이미 형이 확정되어 처벌까지 받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인가.

탁현민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여성주의자에게는 시효나 한도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글 몇 줄이다. 남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성적 판타지에 대해 잡담처럼 적은 글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려 십 년을 넘어서 여전히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몇 번이나 사죄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 이상의 징벌을 가하고자 한다. 도대체 글 몇 줄 적은 것에 대해 얼마나 더 뭘 어떻게 해야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게 되는 것일까? 그냥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심지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저들은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성범죄로 처벌받고 있으니 평소 안면도 있고 친분도 있어도 조문도 해서는 안되고 조화도 보내서는 안된다. 조선시대인가? 아니면 빨갱이 때려잡던 군사독재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그래서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이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서의 이념이 아닌 그를 넘어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목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 기준에 반하면, 아니 단순히 충족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단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념이란 종교다. 종교가 곧 이념이다. 종교적 열정과 이념에 대한 열정은 그래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을 단지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어디에도 인간이 없다. 인간이란 단지 자신들의 이념을 찬양하고 숭배하고 정당화하는 도구이자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라도 빌미가 생기면 그래서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경계토록 하기 위해 이른바 일벌백계란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도 일벌백계 백 사람도 일벌백계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했었다. 공포야 말로 가장 순수한 감정이다.

성범죄로 고소당하고 고발당하는 순간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기정사실이 되어 들려 올 뿐 가해자로 몰린 사람의 입장 따위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더구나 민주당 당적을 가진 현직 시장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언론지형에 대해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차라리 미래통합당에 관용을 보이더라도 민주당에는 가차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당장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었다는 뉴스에 경향일보가 달아 놓은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소당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법정에서 사실을 다퉈서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절대 저들은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아는 것이다. 바로 고소한 당사자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민주당에 적대적인 SBS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라. 과연 그래도 대통령을 꿈꾸던 정치인으로서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박원순 시장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내가 알 방법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전비서로부터 고소당한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면 그런 부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없는데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가? 그러면 묻고 싶다. 죄가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어줄 것인가고. 재판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고 무죄판결이 나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인가고. 유죄의 예단을 가지고 사회적인 인격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저들이 버티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당사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역모로 몰리면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형틀에서 죽거나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목이 잘리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지금 하는 짓거리가 그런 것인데 무슨 결백이고 입증인가?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남은 선택지란 무엇일까? 사회적으로 자신의 인생까지 부정당하고 매장당하는 것과 차라리 몸이 죽더라도 그나마 명예라도 지키는 것 가운데서.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만큼 극성스러웠다. 극성스럽다기보다 오만하고 잔혹했다. 마치 종교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종교를 말살하려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상대의 신전을 더럽히고, 신자들을 학살하며 오로지 자신이 섬기는 신의 영광만을 예찬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신의 영광을 입증하는 또 하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죽여도 아무렇지 않다. 약탈하고 강간하고 파괴해도 누구도 자신들을 말리지 못한다. 당연히 벌하지도 못한다. 그 자체가 신의 위엄이며 은혜의 증명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우월한 것도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할 수 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가 우월한 것 역시 자본가와 지주들을 학살하고 약탈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죽으라. 자신들의 위엄과 공포를 위해 죽어서 제물이 되라. 그리고 어느새 많은 이들이 그런 공포를 체감하기 시작한다. 과연 자신은 저런 광기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더 고약한 것은 이 일련의 상황들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봉주를 미투로 저격할 때 프레시안이 배후에 있었다. 명백히 언론이 개입해서 정치적으로 한 정치인을 저격하려 한 경우였었다. 비단 프레시안 뿐이겠는가. 성범죄가 오로지 민주당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미래통합당에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 것일까. 프레시안도 자칭 진보매체다. 최근 진보의 정체라면 여성주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욱 늘고 있는 중이다.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가 유독 민주당 정치인을 노려 저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지키려 했던 여성주의자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라 자신할 수 있겠는가. 프레시안이 가담했다면 경향과 한겨레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부추기지 않는다면 유독 민주당 출신의, 더구나 유력인사들에 대해서만 미투가 일어나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듣보잡 변두리 정치인도 한 번은 이름을 올려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말하자면 진보가 지금 여성주의를 앞세워 민주당에 싸움을 거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상으로 권력을 가지게 된 여성주의자들은 지금 그 힘에 취해서 미쳐 날뛰고 있는 중인 것이고. 그 와중에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이 해 온 짓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언론이 앞으로 하게 될 짓거리에 대해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만일 사실이라면 여성주의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여성주의자라는 완장을 차고 마녀사냥을 일삼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생명을 끊어 놓은 만행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살인죄보다도 성추행이 더 큰 범죄인가? 수많은 이를 학살하고 고문한 행위보다 성희롱 몇 마디가 더 큰 죄악인 것인가?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의 정의인가?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상당히 늦게까지 미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었다. 여성주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나갔다. 선을 너무 넘고 말았다. 여성주의는 신앙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절대 추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 몇 마디가 시효없는 범죄가 되어 버린다. 무제한적인 책임과 응징이 가해져야 하는 죄악으로 여겨져 버린다. 재판조차 필요없다. 시시비비조차 따질 필요가 없다. 그렇게 몇 사람이나 재판이란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이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정의가 남아 있는가? 그나마 남아있던 알량한 정의마저 더이상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미투라고? 진정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서 미투인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힘을,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서 미투인 것인가?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만 깊어지는 요즘이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남자는 여성주의에 대해 절대 이해할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존재라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어차피 공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강요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듯하니.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과연 그나마 남은 우호적인 남성들의 배려가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무엇일 것인가.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알량하게 힘이 주어졌다고 주체하지 못하고 미쳐 날뛴 여성주의자들 스스로가 만든 결과인 것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파괴는 파괴를 낳는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죽고 파괴되는 그 날까지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다. 두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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