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자 어느 지식인이 그에 대해 반발한 바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어째서 기독교라는 한 가지 가르침만을 강요하려 하는가. 그 말을 들은 로마의 관리는 그러나 이 한 마디 말로 가볍게 그 반발을 잠재웠었다. 이미 우리는 단 하나의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허튼 소리 따위 다 쓸데없을 뿐이다.

 

대충 아주 오래전 읽은 내용을 떠오르는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대략 이 비슷한 대화였을 것이다. 진리의 다양성을 강조하던 로마의 전통적 지식인이 기독교라는 하나의 진리를 따르기 시작한 새로운 로마의 관리에게 무시당하며 비웃음을 사던 장면이다. 당시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했었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세계는 다양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정복지를 늘려갈 때마다 로마에 새로운 신전 또한 늘어나고 있었고, 거기에 스스로 신이라 칭하던 로마황제까지 더하면 뭐 하나 통일되는 것 없이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황제가 스스로 즉위하며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까지 황제였던 것 같은데 저녁이 되니 어느새 암살당했다며 새로운 얼굴이 황제랍시고 로마 시민들 앞에 나서고 있었다. 그나마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즉위를 실시간으로 듣기라도 하지 거리가 좀 떨어진 속주의 시민들은 새로운 황제의 이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황제의 이름을 전해들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정치적으로 황제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니 사상적으로도 구심점 없이 로마사회 전체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런 모두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진리란 당시 로마의 시민들에게 숙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무엇으로 그 답을 삼을 것인가.

 

원래 최초로 하나의 신만을 섬기려 했던 시도는 바로 이집트에서 파라오 아크나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각각의 신을 섬기는 성직자와 그들과 결탁한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라오가 성속의 권력 모두를 아우르고자 하는 목적에서였었다. 하나의 신을 섬긴다면 그 신을 대리하는 파라오야 말로 모든 사제와 귀족의 위에 서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황제를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 일컬었던 것 아니던가. 하늘 자체를 신으로 섬기던 중국에서 하늘의 아들이란 곧 신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의 텐노도 현인신의 지위에 있었다. 단 하나의 신성인 유일신과 그를 대신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란 권력자에게 있어 얼마나 유혹적인 선택일 것인가.

 

그래서 기독교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체계로써 정립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의 황제는 곧 교회의 보호자이자 신의 대리인 그 자체였었다. 로마 황제가 보는 앞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래서 대부분 교리들도 정리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토론은 성직자들이 하되 결론은 로마 황제가 내린다. 그 로마 황제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교황이며 교황이 지배하던 가톨릭의 조직이란 로마의 행정조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이야 말로 로마제국의 진정한 후신일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이 곧 로마다.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교리와 그 절대의 권위를 대신하는 단 한 사람의 황제, 그리고 그 황제마저 사라진 뒤에도 로마는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천 년 넘는 세월을 이어진다.

 

어째서 기독교는 그토록 맹목적인가. 오로지 기독교에 대한 믿음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인가. 원래 출발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 포섭되어 국교가 되는 순간 그리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든 신에게 복종해야 하며, 황제에게 복종하든 신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고 따라야만 한다. 아니면 배신이다. 아니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아예 성경도 읽지 말라. 요즘 개신교회 가운데도 신자들에게 성경을 혼자서 읽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믿고 복종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을 빈 성직자의 말인 것이다. 그 말을 정의한 교회인 것이다. 황제고 교황이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는 당시 가톨릭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코로나로 모두가 경계하고 조심하는 와중에도 오로지 믿음만을 외치며 제멋대로 구는 현재의 개신교 교회들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원래 그런 종교였던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현실의 이유와 필요가 어느새 그렇게 종교를 바꾸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원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저 믿으라. 그저 믿으라. 그저 믿고 따르라. 코로나고 뭐고 상관없이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식을 감염시키고, 어린 손주들까지 감염시키고, 이웃이며 가까운 이들을 모조리 감염시키면서도 어째서 저들은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일반의 자연스런 감정과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럼에도 일부러 감염시키려는 듯 자기가 간 곳을 숨기고, 자기가 한 행동을 속이고, 그러면서 더욱 주변과 가까이 접촉하려 애쓰는 듯한 모습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결국 무지와 맹목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다.

 

종교가 왜 위험한가. 아편도 사실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편은 원래 한의학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약재 가운데 하나였었다. 현대의학에서도 마약류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약물일 것이다. 정도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위험해진다. 주변에 개신교신자가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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