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가 판사가 아닌 경찰에 뜻을 두었다면 어땠을까? 경찰이 되고 싶어 시험을 치르고 순경부터 시작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 있었을까?

 

바로 강민진과 추미애의 차이인 것이다. 지금 여성주의의 주류들과 굳이 여성주의를 말하지 않아도 여성에 대한 인식을 실제로 바꿔 놓은 당사자인 추미애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아마 추미애였다면 오히려 여성의 체력시험 기준이 낮은 것에 분노하며 남성의 기준에 맞춰 준비하려 했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 체력적으로도 충분히 남성과 경쟁할 수 있다.

 

여경이라고 내근으로 발령하려 하면 오히려 화를 냈을 테고, 여성이라고 안전한 곳에 있게 하면 아무리 상사고 선배라도 당당히 따져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성 경찰들에 뒤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현장에서도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 아마 현직경찰 가운데 그렇게 여성임을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경찰로써 남성들과 대등해지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저 공무원이라니까 안정적인 직장을 바라고 지원하는 것이 아닌 사명감을 가지고 민중의 지팡이가 되고자 지망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강민진류가 바라는 여성상이 아니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 여성이 굳이 근력을 키울 필요도 없고,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한 격투능력을 갖출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은 남성들을 위한 것이고 여성은 그저 여성으로서 여성답게 지금 모습 그대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특혜만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 할당제가 필요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남성과 굳이 동등해지려 하지 않으면서도 남성과 숫적으로 같은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 그를 위해서는 여성으로서 남성과 대등해지려는 여성들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강민진류가 추미애를 공격한 이유다.

 

남성과 대등해지기위해 노력한다. 더 독하게 더 악착같이 남성들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러면 여성이 아니지 않은가. 여성은 약한 존재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능에 있어서도 남성에 비해 훨씬 열등한 존재다. 그러므로 사회가 일방적으로 여성만을 배려해야 한다.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오로지 말도 행동도 조심하면서 그저 기회를 주고 관용만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 책임을 묻는 것도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서라고 이런저런 상사 주변의 잡무를 맡기는 것조차 성희롱이네 성추행이네 범죄시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접촉하는 경우도 늘어나게 된다. 그 가운데는 서로 부대끼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여성은 어느 순간에도 조심해야 하는 존재이고 아끼고 살펴주어야 하는 존재다. 마주 음담패설도 주고받고 때로 서로 상처가 될만한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오갈 수 있는 동료란 여성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최근 여성임을 앞세워 국회의원이 된 대부분 정치인들이 추미애와 구분되는 지점일 것이다. 구태정치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추미애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여성임을 앞세우지 않았었다. 한 번이라도 자신이 여성임을 앞세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던가.

 

여성이라고 훨씬 낮은 기준의 시험을 통과해 경찰이 되었더라도 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남성이 하는 일을 자신도 할 수 있게끔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독려하는 것이 여성주의였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여성이지만 남성의 체력기준을 충족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던 이들에 비난부터 쏟아붓고 있었다. 여성도 할 수 있다는데 오히려 비난을 퍼부으며 여성주의의 적이라 선언했었다. 내가 여성주의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버린 순간이었다. 어째서 여성이 남성만큼 강하면 안되는 것인가.

 

탈코르셋이란 지방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마음껏 지방을 늘리는 것만이 탈코르셋이 아닌 것이다. 지방을 늘리는 것에는 호의적이면서 근육을 늘리는 것은 적대적이다. 미용을 위한 몸가꾸기가 아닌 실제 근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들에는 아예 무관심하기만 하다. 그냥 속편하게 먹고 싶은대로 쳐먹고 그런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인가. 여성도 노력하면 100kg 바벨도 얼마든지 들어올릴 수 있다. 생물학적인 차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생물학적 한계에 크게 못미치는 최소한의 체력기준 정도는 남성과 동등하게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귀찮다. 힘들다. 그래서 편하게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할당한 자리에 자신을 우겨 넣으려 한다.

 

일본에서 한 여경이 칼을 든 남성을 제압하는 장면이 우리나라에서만 화제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식이다. 여성도 남성과 다르지 않다. 여성 또한 남성과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 주장하는 것은 오로지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일 뿐이다. 온실의 화초처럼 그저 여성을 우대하며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추미애가 떠오른 이유다. 90년대 사람들이 멋지다 생각했던 여성들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일 것이다. 여성은 약하지 않다.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주장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여성은 퇴보하는 것일까? 시대가 씁쓸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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