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소설 '개미' 중에 개미를 좋아하다가 개미의 잔혹한 본능을 보고는 오히려 혐오로 돌아선 과학자가 한 사람 나온다. 오래전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사회복지 공무원 가운데 비슷한 이유로 복지의 대상이 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던 이들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이래야 한다. 소외된 사람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 또한 주체적인 사고를 하는 독립된 인격으로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악착같이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부하게 된다. 저런 건 내가 생각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 아니다.

 

이재명이 자기 부인을 위해 일정까지 취소했을 때 진중권이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일반 직장인들이 그랬다가는 잘린다. 그러라고 있는 연차다. 설사 연차 다 썼더라도 휴직이라는 제도도 있다. 휴직이 아니더라도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한 뒤 출근을 늦출수도, 조퇴할수도, 아니면 결근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가 다니는 그리 대수롭지 못한 직장에서도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굳이 진중권은 일반 직장인을 이야기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중권이 자칭진보이던 시절 머릿속에 이미지로 가지고 있던 일반 직장인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논란이 한창이던 때 민주노총 위원장이란 놈이 '썰전'에 나와서 그런 개소리를 지껄인 적이 있었다. 편의점 알바들도 식대 교통비 받을 텐데 이런 비용들까지 최저임금에 산정하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편의점 알바 해 봤거든? 식대 없었다. 그나마 유통기한 지난 이른바 폐기 식품들을 거저 가져가서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교통비? 세상에나 그런 훌륭한 소리를. 망상이다.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머릿속에 구축된 이미지로 대상을 판단한다. 전에도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어째서 자칭 진보는 무식한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주관적 이미지에 끼워맞춰 판단하려 한다. 드러난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조국에 대한 비난부터 쏟아내는 손석희가 그런 경우다. 내가 옳다고 여기므로 사실여부와 상관없다.

 

그래서다. 자칭 진보가 오히려 수구들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은. 탈원전을 위해서는 원자력발전소가 여전히 지어지고 있어야 하고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탈원전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탈원전을 주장하는 자체가 어색하다. 그래서 현정부의 탈원전을 비난하며 탈원전을 주장하는 이중성을 아무렇지 않게 보인다.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노동자들이 먼저 낮은 최저임금으로 인해 곤란을 겪어야 한다. 대체휴일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도 대체휴일이 없어 어려워하는 노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벌써 도입되어 실행되면 불편한 것이다. 그러므로 벌써 내가 복무하던 시절에도 사정이 있으면 사후결재를 전제로 휴가를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째야 하는가?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동자,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의 모습 그대로 국민들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 입장에서 국민의힘은 '노동존중의 정당'이고 민주당은 아닌 것이다. 차라리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보다 진보적 가치와 지향에 부합한다.

 

국민의힘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정통권력이라는 저들의 인식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정상상태다. 사회적 약자들이 억압당하고 차별당하는 것이야 말로 저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상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모든 진보운동이 출발하는 것이다. 김학의가 무죄가 되어야 여성운동도 가능하다. 김학의를 처벌할 수 있는데 여성운동은 의미가 없다. 일단 이명박과 박근혜 상태에서 그를 극복하고 혁신하기 위한 진보운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보다 하나라도 더 좋아져서는 자신들의 이해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진보운동을 위해서라도 사회를 정상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정당한 권력이 지배해야 한다.

 

그래서 한 편으로 저들은 민중을 혐오하는 것이다. 노동자라면 마땅히 자신들에 도움을 구걸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라면 당연히 자신들에 온정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북적북적 으쌰으쌰 새로운 대안을 찾고 하나씩 바꾸어 나가려 하고 있다. 오죽하면 자칭 진보에게 40% 가까운 민주당 지지자는 국민도 아니다. 그토록 혐오와 차별을 반대한다는 자칭 진보가 이들에 대해서만큼은 거리낌없이 증오와 저주의 발언을 내뱉을 수 있는 이유다. 대상이다. 주체가 아니다. 그런 대상 주제에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스럽고 혐오스럽겠는가.

 

자칭진보 단체가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하고, 자칭 진보언론들이 그를 홍보하고 나서는 이유인 것이다. 심상정이 유독 이재명에게만 각을 세우고 윤석열은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겨레 역시 윤석열의 공약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반기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이 당선되고 윤석열의 공약대로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들이 진보로써 바로 설 수 있다. 진중권이 변절한 것이 아니란 이유다. 변절이라기보다는 자칭 진보로써 더 선명해지려는 의도에 가깝다. 정의당과 한겨레가 과연 진중권과 다를 게 무엇인가. 원래 그런 부류들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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