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역사적인 발명이나 발견을 한 경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이룬 일입니까?"


그만큼 자신이 이룬 업적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너무 대단해서 자신이라는 그릇 안에 담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이고 의지이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나 혁명가, 정치지도자들이 뜻밖에 쉽게 독재의 유혹에 빠져들고 마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다. 나의 실력이고 나의 노력이고 나의 업적이다. 만일 운에 의한 것이라면 그 운마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내 것이다. 사상도, 이념도, 혁명도, 권력도, 국민도, 국가도,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내가 모두 짊어지고 책임져야만 한다.


한국진보의 가장 큰 문제라면 아직까지도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못배운 가난한 노동자들을 일깨우겠다고 야학에 나서던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들을 일깨워 그들의 고단한 삶을 바꾸겠다고 농활에 나서던 시절에서 전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옳았고 내가 이끈 것이었다. 자발적 주체로써 대중을 보는 것이 아닌 타율적 객체로써 대중을 인식하려 한다. 그러므로 작년 그 추운 겨울 수많은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촛불을 들었던 것은 자신들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진보진영의 촛불시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촛불시위란 자신이 잠시 그 일부가 되었던 시민의 거대한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마 두려워하고 차마 삼가며 그 뜻을 받들고 쫓기 위해 신중을 기한다. 그에 비해 진보진영은 촛불시위란 자신들의 것이다. 거리로 모인 시민의 의지란 자신들이 만든 자신들의 소유다. 실제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자신들이 시민을 이끈다. 대중을 가르치고 일깨운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들만이 대중의 앞에 있어야 한다.


아니나다를까 진보진영에서 촛불을 무기삼아 문재인 대통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이 촛불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양, 아니 촛불시위가 주머니속의 알사탕마냥 아무때나 꺼내먹을 수 있는 자신들의 소유라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들을 거스르는 것은 촛불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신들을 따르는 것은 촛불민심을 따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한 마디 하려 해도 원래 한국진보는 그랬었다.


책으로 배운 진보인 까닭이다. 현실과 밀착해서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며 깨달은 진보가 아닌 어디서 남이 써놓은 책에서 읽고 자기 것처럼 여기며 쫓아온 이상이고 신념인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들의 자원약탈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 식민지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약탈에 대해서는 정당한 거래행위로 인식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란 자체가 원래 없는데 일본과 조선이라는 민족의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쌀을 팔아넘긴 조선인과 쌀을 산 일본인만 존재한다. 조선의 처녀들을 유인하고 납치해 팔아넘긴 조선인과 그로부터 사들여 이용한 일본인만이 존재한다. 일본의 전쟁범죄는 없다. 최소한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다수 진보와 뉴라이트 사이에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가 모르겠다. 탈민족주의도 유행이 지나가고 있는 듯하니.


유시민 말마따나 소매상처럼 외부로부터 유입된 지식을 대중들에 전파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어떤 사명으로 여기는 숭고함이 문제인 것이다. 그만큼 자신들이 하는 일은 대단한 것이고 그런 일을 하는 자신들은 대단하다. 그것을 대중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것을 대중이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대중은 자신들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한다. 오만이라기보다는 순진한 것이다. 세상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한바탕 게임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고 나면 너무나 쉽게 전향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교조 합법화는 나 역시 전부터 항상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터였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역시 부당하게 체포되고 투옥되었으므로 사면복권되어야 한다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주장하기 위해 촛불을 앞세우는 것은 겉넘는 짓이었다. 자신들 역시 촛불시위에 동참하기야 했을 테지만 촛불은 전적으로 그들의 소유만은 아니었다. 소유이기는 커녕 문재인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촛불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촛불의 지분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촛불이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들먹이며 수단으로 이용한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을 자신의 들러리로 여기는, 주체로써 시민들의 자발적 역량과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오만이며 결례인 것이다. 누구도 촛불을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었다.


수단이 잘못되었다. 정히 자신들이 옳다 여긴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정부와 여당에 건의하고 대화든 협상이든 공적인 통로를 통해 양해와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어야 했을 것이다. 정부가 공약인 탈원전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공론으로 만들어 정부는 물론 야당까지 압박하여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대통령 하나만 바뀌면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가장 민주주의의 기본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옳더라도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인정될 수 없다.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가운데 더구나 소수다. 자신들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들이 대표일수도, 머리일수도, 스승이거나 리더일수도 없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주체로써 시민 자신들이다. 어째서 자신들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소수로써 변방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스스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


정작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더 당혹스럽다. 굳이 저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들의 정당성까지 해쳐가며 정부에 상처입히려 시도할 필요는 없을 텐데. 역시나 책으로 배운 진보라 그렇다. 대한민국의 현실보다 머릿속의 이상이 더 중요하다. 배신당한 느낌이다. 그래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목적이 옳다고 수단까지 정당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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