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회사 사장이 뉴스에 나왔다. 글쎄 다른 기업 사장들과 담합을 했단다. 심지어 정권에 뇌물도 상당히 갖다 바쳐 구속위기다. 그런데 그렇게 담합하고 뇌물 갖다 바치는 사이 회사의 매출도 늘었고 덕분에 성과급까지 두둑하게 월급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들어오게 되었다. 직원 입장에서 사장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그래서 공인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개인이 아닌 공적 존재로써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인 것이다. 때로 개인의 선과 도덕과 양심을 벗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군사작전을 지시하고 승인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 큰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서 작전에 참가한 군인들은 물론 상당수 민간인의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단호히 군사적인 행동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쿠바 미사일사태 당시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에도 끝까지 단호한 행동으로 소련과 대치했던 케네디의 리더십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되면야 당연히 좋겠지만 일단 리더가 되고 나면 마냥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이유인 것이다. 좋은 리더가 될 것인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 리더로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차라리 악역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할 것인가. 후자를 들어 흔히 송양지인이라 부른다. 차라리 내가 비난을 듣고 나라를 살리는 것이 리더로서 어울리는 덕목인 것이다. 내가 모든 오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리더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가치인 것이다. 집단의 이익이 지켜질 때 리더는 비로소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래서 공인이다. 한겨레가 이명박에 대해 평가한 것을 두고 찬양이라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찌되었거나 개인적으로 어쩐 부정을 저질렀든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익도 지켜내지 않았는가. 대통령에게 그 이상 뭘 바라게?

 

사람들이 리더에게 바라는 것도 이런 것들이다. 나 대신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손에 오물을 묻히고 온몸에 피칠갑을 할 수 있는. 어떤 비난과 모욕과 조롱에도 기꺼이 나를 대신해서 내 이익을 지켜 줄 수 있는. 그러니까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가난한 이들은 '그 분이 다 해 주실 거'라며 눈물까지 흘렸던 것이었다. 나쁜 사람인 것은 안다. 탐욕스런 인물인 것도 안다. 대신 그만큼 기꺼이 악역을 맡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삶을 나아지게 해주지 않을까. 그러니까 당장은 반대편으로부터 비난을 듣고 공격도 받겠지만 당원과 지지자들을 위해서, 무엇보다 국민을 위해서 차라리 그런 모든 것을 감수하고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겠다. 필요하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반드시 국민을 위한 결과를 내놓고야 말겠다. 과연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차기 리더로써 그만한 결심과 각오가 보이고 있는가.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 이낙연의 차기대선후보로서의 지지율이 경기도지사 이재명에게 추월당하며 지지부진한 상황에 놓은 이유인 것이다. 무려 174석의 거대여당이다. 열린민주당 등 우호의석까지 모두 더하면 민주당 혼자서도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거대여당의 대표로써 과연 그동안 이낙연이 이룬 것이 무엇이 있는가? 공수처법을 통과시켰는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통과시켰는가? 아니면 말로라도 이재명처럼 강경한 목소리로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고 있었는가? 이재명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무사안일의 관료사회를 비판하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부르짖고 있는 동안 이낙연은 여전히 총리시절 그대로 사람 좋은 당대표로써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 내 발을 오물에 닿게 하지 않겠다. 내가 진흙투성이가 되지는 않겠다. 그러니까 모양 좋게 그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겠다. 자국민이 타국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아니 대한민국의 영토를 타국이 침략한 상태에서도 그저 사람 좋은 자기 이미지만 챙기겠다는 뜻인가.

 

미안하지만 이낙연에게 남은 시한은 그리 많지 않다. 윤석열을 향해 비로소 한 마디 내뱉기는 했지만 이재명과 달리 이낙연은 말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행동에 나서야 한다. 주어진 힘을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결단해야만 한다. 지금도 이미 많이 늦었다. 어차피 언론은 반대다. 어떤 언론도 지금 민주당이 추진하는 개혁법안들에 좋은 기사따위 써주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힘도 그것을 알기에 끝까지 반대하며 훼방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저들로부터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그저 인내하기만 하는 것은 그냥 멍청하다는 소리다. 개인으로서는 인품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리더로서는 무능을 넘어 그냥 병신찐따짜가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재명을 그다지 미더워하지 않는 나로서도 거의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벌써 이낙연 지지에서 이재명 지지로 돌아선 이들도 제법 보이고 있다. 민주당을 개인의 선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길 것인가? 자신마저 민주당의 정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길 것인가?

 

어쩌면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당대표가 안되었다면 영영 이런 이낙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자칫 대선후보 경선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결단하지 않는 이낙연은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자격을 넘어 기본 자체가 안되어 있다.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고, 책임져야 할 때 책임지지 못한다. 비난과 공격이 두려워서 마냥 주저하며 눈치만 본다. 지난 20대처럼 민주당 의석이 국민의힘과 비등비등한 상황이면 또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단호했던 추미애 장관과도 그래서 비교가 되는 것이다. 추미애 장관을 지지해 볼까? 스스로 정치생명까지 내주어가며 검찰개혁을 위해 온몸으로 부딪혀 싸우고 있는 추미애 장관에 비하면 이 얼마나 한심한 모습인가.

 

이미 공수처설치는 앞으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 아닌 단지 출발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일단 공수처부터 설치하고 나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주 전 이낙연에 대해 글을 썼을 때는 대권을 위한 상당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안정감도 좋지만 결국 국민이 바라는 것은 주어진 힘을 필요와 목적을 위해 과감하게 사용할 줄 아는 용기와 의지, 즉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이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될 수는 있지만 리더가 항상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리더가 좋은 사람이고자 하면 그는 리더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과연 이낙연에게 무언가를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리더십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사람은 좋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것이다. 한계가 가까워 온다. 실망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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