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무역은 지배층의 사치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전근대사회에서 대부분의 피지배층들은 굳이 다른 곳에서 생산된 물품을 구입해서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을 가지지 못했었다. 조금 아쉽더라도 그냥 인근에서 생산된 것들만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을 가져오기 위한 적지 않은 비용과 수고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의 영주들의 삶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양산형 판타지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는 것들로만 먹고 입고 쓰며 살았었다. 영지에서 경작한 밀들과 영지에서 농민들이 직접 길러서 바친 닭과 돼지와 양과 농민들이 직접 집에서 만든 치즈와 버터와 와인과 맥주를 먹고 마시며 살았었다. 영주와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들 또한 농민들이 직접 집에서 짠 천들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그 천들로 옷을 짓는 것 역시 농민들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때때로 자기 소유의 숲에서 사냥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농민들보다야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고 입고 쓸 수 있었으므로 크게 불만을 없었을 것이었다. 이슬람과 무역하며 사치품을 실어 나르던 상인들만 아니었어도.

 

중세유럽의 장원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귀족은 사치를 해야 했다. 다른 어느 귀족들에 뒤지지 않도록 사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치는 귀족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영지의 농민들을 쥐어짜야 했다. 정확히는 상인들이 요구하는 금화를 만들기 위해서 농민들이 생산한 작물과 수제품들을 팔아야 했는데 상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다 보니 결국 농민들의 수탈에 가까운 손해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직접 생산물들을 세금으로 거둬들여 상인들과 거래하기보다 농민들에게 직접 상인들로부터 화폐를 구해 바치도록 한 탓에 거래에서 우위에 있던 상인들은 농민들로부터 착취에 가까운 폭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짓거리를 국가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 바로 중상주의였다. 그런 권리조차도 돈받고 팖으로써 프랑스의 군주들은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어째서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인도를 찾겠다고 아프리카의 남단을 항해해야 했던 것일까? 콜롬부스에게 인도를 찾으라고 세상 밖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배와 막대한 비용까지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감자가 유럽 농민들의 영양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악마의 작물이라며 아예 감자를 먹지 않던 나라도 적지 않았다. 영국에서도 감자는 아일랜드의 거지들이나 먹는 부도덕하고 사악한 식품이었다. 오히려 초기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막대한 금은 에스파냐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바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대부분의 금과 재화들은 에스파냐의 군주들을 위해서 쓰였을 뿐 일반 국민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하긴 근대 이전의 국가란 곧 지배층이었다. 아니 근대 이전의 국민이란 곧 세금을 낼 수 있고 국가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지배 아래 있는 농민들을 용병들의 약탈대상으로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럽의 전쟁에서 농민들을, 심지어 도시까지 약탈했던 이들은 비단 적들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고용주의 마을과 도시까지도 얼마든지, 심지어 허락을 받고 약탈할 수 있었다. 그래도 되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의 역사란 그런 대부분의 피지배층을 배제한 지배층의 역사였던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근대 이전 지배층이 아닌 이의 이름이 과연 얼마나 나오고 있을까?

 

그래서 유럽인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미지의 위험을 감수해가며 인도를 찾기 위한 항해에 나섰던 것이었다. 인도에는 향신료가 있었다. 후추가 있었고 정향과 육두구가 있었다. 더 동쪽으로 중국에서는 차와 비단과 도자기를 수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피지배층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들여 온 수입품들은 너무 비싸서 일정 이상의 부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감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모험가와 상인들은 기꺼이 그런 수고를 감수할 수 있었다. 일단 항해만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그만한 이익이 있을 터였다.  그런 확신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게 했다.

 

그러면 조선은 어땠을까? 아니 조선에서 오히려 고려보다 상공업이 쇠퇴한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사치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사치를 과시하는 여느 다른 지배층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상인들은 뻔질나게 배를 몰고 그 사치를 위한 물품들이 있는 중국으로 항해를 떠나야 했었고, 마찬가지로 중국과 아랍의 상인들까지 물건을 잔뜩 싣고 배를 몰아 고려까지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달랐다. 물론 실제로는 조선의 사대부들도 상당한 사치를 누리기는 했었다. 하지만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사치는 사대부로서 기피해야 할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이항복이 친구인 이덕형의 별장을 두고 돼지집이라며 청청당이라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차라리 맹물로 배채우며 초가집에서 학식을 닦아야지 이런 사치스런 별장을 두고 호사를 누리는 건 사대부와 맞지 않는다. 그런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굳이 멀리까지 배를 몰아 찾아가서 사치품을 사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겠는가.

 

아마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것이다. 금욕과 절제를 앞세웠던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부르주아들조차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사치는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중국의 지배층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중국의 부자들은 버는 만큼 사치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 또한 그만한 수입을 갖지 못해서 그렇지 돈이 있으면 그 이상 사치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도 한국인들은 부자들이 사치한다고 언론까지 나서서 생지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이 있으니 쓰려는 것이고,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니 지불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닌 것들이 왜 남 돈 쓰는 것을 가지고 지랄하는가. 한국인의 도덕관에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쓰고 사는 것은 그만큼 부당하고 부적절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들이 개인적으로 사들고 온 것을 어찌어찌 구해서 쓰는 정도는 괜찮지만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중국까지 사람을 보내 사오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를테면 외국에 나갈 일이 있는 사람을 통해 구매대행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소량으로 구매하는 것이야 이전부터도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정식으로 수입해서 유통하는 것은 별개로 더 엄격한 기준과 관리가 필요한 지금의 체계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렇게까지 사치를 누리는 것이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치품들을 조선의 상인들이 공공연히 유통할 수 있었을 것인가.

 

결국은 수요가 생산을 이끌고, 소비가 유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요와 소비가 검약이라는 이름으로 억제되었으니 생산과 유통이 자극되었을 리 없다. 그런 도덕적인 엄격함과 엄숙함이 완화된 조선후기에 들어, 더구나 지배층인 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의 상공인들에 의해 조선에서도 유통의 발달이 촉진되고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사치에 있어 더 자유로웠던 중인 이하의 계층들이었기에 사대부들보다도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소비가 가능했다. 물론 당시까지도 대부분의 유통은 사치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어차피 전근대사회에서 운송수단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수레 한 대, 배 한 척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물품의 양은 제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기란 어려웠다. 그러므로 적은 양으로도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치품이 무역과 상거래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밖의 생필품들은 대부분 필요한 당사자가 직접 생산해 소비하는 자급자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이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