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갈량의 북벌은 명분이야 그럴듯했지만 촉한의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당장 북벌에 동원된 최대 10만의 병력은 당시 촉한 인구 100여만 가운데 무려 10%에 이르는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더구나 전장에서 병사로써 쓸모있으려면 한창 일할 나이의 장정들이어야 했을 테니 노인과 여자, 아이들만이 남은 나머지 백성들의 어려움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이들 10만의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킬 재원을 이들 남아있는 사람들만으로 모두 감당해야만 했었다. 참고로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인구가 4600만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00여만을 병사로 동원해 고구려로 원정한 결과 그대로 망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정작 촉한의 백성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갈량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었다. 어째서?


지금 당장 한국사람들에게 유럽의 복지국가들처럼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라 하면 폭동이 일어난다. 감히 내 생떼같은 돈으로 도대체 뭔 짓을 하려고 세금을 그렇게나 많이 떼어가는 것인가. 이는 수탈이고 착취다. 그런데 정작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일상이 되고 상식이 되어 버린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다. 어째서 같은 세금을 두고 이같은 전혀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그 답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내는 세금이 얼마나 타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와 과정들을 거쳐 제대로 목적에 맞게 쓰이고 있는가. 수취자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거나, 아니면 수취과정에서 부당하게 편향된 이익을 누리는 자가 나타나지는 않는가. 최소한 나만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같이 손해본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다. 바로 정의다.


정치에 있어 정의란 곧 분배의 정의다. 사람이 정치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것부터가 한정된 생산을 얼마나 공정하게 공평하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어떤 이유로 얼마를 나누고, 누구에게는 또다른 이유로 얼마를 나누고, 그래서 그 논리나 절차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면 구성원들은 그에 대해 기꺼이 동의하게 된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관이 공동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그에게 제사에 필요한 만큼 더 많은 것이 돌아가는 것이 옳다. 서로 죽이고 죽는 치열한 전란의 한복판에서는 자신들을 지키고 위협이 되는 적을 무찌를 전사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강의 물길을 바꾸고 농지 곳곳에 물을 대고자 한다면 그를 지휘할 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다. 구성원들이 동의한 순간 사회는 안정되고, 그에 대한 구성원들의 불신과 의혹이 생겨난다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마침내 하나의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가 나타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과연 지금 생산의 분배는 얼마나 공정하며 합리적인가.


그런 점에서 형벌과 정치가 엄격했음에도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는 진수의 평가야 말로 승상 제갈량이 어떻게 촉한의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을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말해주고 있었을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작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상을 주었다. 죄가 없다면 벌주지 않고 오히려 진짜 죄가 없는가를 가려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한다. 그러므로 벌을 받는다면 반드시 죄가 있다는 뜻일 테고, 죄가 없다면 억울하게 벌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장 집안에 일할 사람이 모두 전장으로 끌려가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만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야 하지만 그마저 촉한의 백성이라는 위아래 할 것 없이 한결같다. 정해진 이상을 거둬가는 법도 없고, 그로 인해 부당하게 이익을 챙기는 자도 없다. 비록 풍족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기만 한 삶이지만 이나마라도 충실히 거스르지 않고 따르면 내일도 똑같이 누릴 수 있다.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쌀밥보다 마음편히 온전히 내것으로 먹을 수 있는 한그릇의 피죽이 결국에는 더 기꺼운 것이다. 가난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억울하고 부당한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제갈량이 진정 위대한 정치가라 여겨지는 이유다.


내가 제갈량을 중국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재상인 소하보다 윗줄에 두고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한정된 자원으로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끊임없이 공급한 행정력만을 두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제갈량이 승상으로서 촉한에서 했던 일들이야 말로 바로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정의'였기 때문이다. 부당하지 않고 항상 공정하며 합리적이다. 시키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유가 있고 납득할 수 있는 기준으로 징발하고 책임을 묻는다. 따른다면 상이 있을 것이고 거스른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벌받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자신을 벌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정이 자신에게 부당한 요구나 지시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오로지 그것들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완전한 신뢰다. 물론 실제는 그렇게까지 완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가깝다. 어쩌면 인간이 꿈꿔온 이상사회에 아주 가깝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해서 더 많은 것들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등따습고 배부르게 풍족한 일상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움에 떤다면, 혹은 그로 인해 죄책감을 가진다면 그것은 바른 정치라 할 수 없다. 국민이 정부를 의심하고, 정부는 국민을 불신하고,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감시하며 다투고 갈등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어차피 어느 사회든 모든 구성원에게 풍족하게 돌아갈만한 생산을 가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한 생산이 있으면 그만큼 인구 또한 늘어나게 된다. 결핍은 인간의 숙명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숙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안정된 자신의 삶을 누린다. 법이란 약속이다. 정책이란 모두 국민과의 약속이다.  그리고 더 많은 책임은 그 약속들을 먼저 했던 정부에게 있다. 최소한 정부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민주주의국가에서는.


대단한 것이다. 인구의 1할을 병력으로 동원하고, 그 1할을 먹이고 입히고 무장하는 모든 것을 한정된 촉한땅에서 생산해서 공급했음에도 전혀 백성들의 마음에 흔들림같은 것은 없었다. 정작 그것을 주도하는 제갈량에 대해 어떤 불만도 원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백성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당연히 지배층에 대해서도 엄격했을 것이다. 전장으로 끌고 온 병사들을 위해서 굳이 장비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만일 제갈량이 촉한이라는 작은 지역이 아닌 천하를 다스리는 제국의 재상에 있었다면. 하긴 촉한이러서 가능했을 것이다. 촉한까지는 온전히 제갈량이 자신의 의지 아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다섯번에 걸친 북벌이 가능했던 이유다. 항상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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