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읽었던 역사소설에서 유자광이 갓 즉위한 예종을 만나고 돌아가서 아내에게 말하는 내용이 있었다.

 

"아주 훌륭한 임금님이시로구만. 내 계책이 잘 먹혀 들겠어. 이제 앞으로는 입신양명의 길만 남은 게야."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남이의 역모를 고변하게 된다.

 

물론 소설이다. 실제로도 어떠했었는가는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다만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의외로 저런 종류의 모함이 제법 아주 잘 먹히더라는 것이다.

 

역사상 군주들 가운데 모함이 유독 잘 먹히는 경우를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는 열등감이 있고, 둘째로는 그런 열등감에서 비롯된 비대해진 자아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런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신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작은 의심조차도 어김없는 사실인 것이다. 사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무오류가 오류를 만드는 것이다. 완전무결이란 그런 오류를 인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류의 가능성조차 인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자신의 권위와 존재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그런 부류들에게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스스로 가지게 만든다면 그로부터 확신은 사실이 되고 마침내 진실이 되어 어떤 변명과 반론도 듣지 않게끔 만들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려 해도 아예 예단하여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죽어도 의심은 남고 아주 작은 단서로도 죄는 증명될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결백이란 표현까지 쓰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다. 전혀 아무런 티끌만한 흠도 자신에게는 없다. 검찰의 별건수사는 그런 점에서 아주 역사도 유구하다 할 수 있다. 죄에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다 여기기에 사람에게 벌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고 벌을 주고자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것이라도 벌을 줄 만한 이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고문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죄를 고발케 하여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혐의들에 대해서도 자신은 전혀 무고하며 아무 잘못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결백을 입증하지 못했으므로 죄인으로 처벌받아야 한다.

 

현대의 사법제도가 지금과 같이 발전해 온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사람이 아닌 죄를 처벌해야 하는가. 어째서 무죄를 전제로 수사하고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사람을 처벌해 온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단정짓고 수사와 재판을 해왔던 역사에 대해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 되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약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자인 수사기관이 증거를 수집해서 유죄를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고발을 당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의혹들에 대해 - 심지어 자신과 관련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안들까지 일일이 대응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원래 무고하기에 전혀 상상도 못한 부분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고발이 이루어지면 그에 대한 반박근거나 논리를 찾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벌써 10년은 넘게 지난 타진요 사태에서도 확실히 그것을 느꼈었다. 네티즌이란, 아니 현대의 대중이란 멍청한 전제시대의 군주와 같다. 자기가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생각한다. 명석하게 깊이 꿰뚫고 있다 착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은 항상 어김없이 옳다. 근거야 얼마든지 머릿수도 많으니 스스로 납득만 할 수 없으면 아무거라도 찾아서 들이밀 수 있다. 판단은 자기가 하는 것이다. 결론도 자기가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자신이 제기한 모든 의문들에 대해 대답하고 해명하라. 도저히 터무니없는 질문들이기에 대답을 궁리하는데조차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질문했으니 바로 대답해야 하고 아니면 너는 유죄다. 유자광이 이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래도 설마 역대 조선의 국왕 가운데 이정도로 멍청한 왕은 없었다.

 

아무튼 언론이 의혹을 제기했으니 정의연은 무조건 해명부터 해야 한다. 어찌되었든 누군가 의혹을 폭로했으니 윤미향은 무조건 그에 대한 대답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해명하고 답을 해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눈과 귀는 다른 누군가가 터뜨린 또다른 의혹으로 향해 있다. 그러니까 해명하라. 그러니까 답을 하라. 아니면 유죄다. 그런데 정작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의혹에 대해 다른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것인가.

 

그냥 대충만 봐도 근거도 불확실한 불완전한 의혹들이었다. 대개는 무지에서 시작된 의심이었으며, 그럼에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지속된 의혹들이었다. 사실과 사실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문제제기에 어떻게 바로 구체적인 답까지 들려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지금 정의연 논란을 보면서 얼마나 대한민국 대중들이 위안부문제에 관심이 있는 척 하면서 정작 아무런 관심도 없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앞장섰던 자칭 진보들 역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한 상태였었다.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벌써 정의연의 편에서 정의연을 대신해서 많은 사실들을 해명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기에 그런 해명들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의심하며 의심을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웃긴다는 것이다. 아무라도 되도 않는 주장이라도 내지르면 당연하게 정의연과 윤미향은 그에 대한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주장의 근거를 대기보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도 그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대답을 정의연과 윤미향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미 사실로 확정짓고 통장을 까라, 계좌를 까라, 영수증을 내놓으라. 그럴 주제도 안되는 것들이.

 

오죽하면 이용수씨가 그리 주장한다고 수요집회의 의미마저 부정하고, 그동안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실인정과 반성을 요구한 사실마저 부정하려는 이들까지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그런 것 상관없이 이미 1995년에 아시아여성기금을 받고 끝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끝까지 일본이 조성한 민간기금으로 위로금을 받는데 반대했던 정대협을 비판하며 박근혜정부의 위안부합의에 반대했던 사실마저 비난한다. 어째서 위안부가 아닌 성노예라는 표현이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지식조차 없이 피해자들이 반대하니 써서는 안된다. 그것이 과연 위안부 피해자들과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심에서 나온 것들인가. 과연 위안부문제에 대해 평소 관심을 가져왔다면 그런 주장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진짜 박근혜 정부에서 이루어진 위안부합의가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었는가.

 

하지만 자신들이 틀릴 리는 없으니까. 언론이 시작했어도 이미 자신들이 결론을 내린 이상 결과도 그렇게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자신들은 틀리지 않았다며 타블로를 비난하는 타진요 찌그러기들이 인터넷상에 기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은 옳다. 국민은 옳다. 그러므로 자신도 옳다. 절대 틀릴 리 없다. 그래서 선동하기도 쉽다. 선동당한다는 생각조차도 없다. 이미 그렇게 자신은 믿고 있고 결론까지 내린 뒤이니까.

 

길원옥 할머니의 의손녀라는 여자가 이번에 돌아간 쉼터 소장에 대한 어떤 의혹을 제기했다. 근거같은 건 없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명 역시 정의연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 사실이니 진실이니 하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저들이 바라는 것은 조선시대 옥사에서처럼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의 근거일 텐데.

 

위안부운동은 이렇게 끝난 것이다. 한겨레의 최근 기사들을 보면서 토악질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이 지경까지 오도록 자신들도 열심히 도왔으면서 이제와서 위안부운동의 취지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는다.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다. 마치 자신들은 아니었던 척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미 위안부운동은 끝났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테니까. 더이상 이어갈만한 무엇이 남아있기는 한가. 보완하고 고쳐서 이어나갈 무엇이 있기는 한 것인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의 선입견이란 것은. 더구나 자기가 무척 잘났다 여기는 인간들이 가진 예단과 확신을 넘어서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역사상 그리 훌륭하고 뛰어난 이들조차 되도 않는 모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족까지 몰살당하고 했던 것이다. 그 반복을 보게 된다. 대중에 대한 혐오다. 참 대중적이다.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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