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들어 눈앞에 적의 탱크가 있다. 그런데 나는 빈 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튀어서 숨는다. 숨는 게 안되면 항복한다. 괜히 싸워보겠다고 돌이라도 던졌다가는 다진 고기가 되기 십상이다.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정의연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명분과 정당성에 기대어 존재하는 기생단체다. 성노예 피해자들이 없으면 정의연도 존재할 의미를 잃는다. 피해자들이 부정한다면 더욱 정의연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피해자 가운데 정의연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해체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왔다. 맞서서 이길 수 있을까?

 

적이 아니라면 대화로 해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대화로 풀어낼 여지가 남아 있는 사이라면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진심을 담아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계는 이미 벌써 넘어 버렸다. 윤미향 이사장은 이미 죄를 저지른 범죄자고 정대협은 해체해야 할 단체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뭐라고 말을 더해야 다시금 정의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없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어차피 되도 않을 일에 자꾸 말만 더하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적이지만 이길 수 없다. 아버지가 적이라면 항복해야지. 할머니가 적이라면 돌아서서 함께 싸울 뿐이다. 지금껏 자신들을 있게 해 준 할머니가 죽으라고 칼을 휘두르는데 괜히 맞서겠다고 하다못해 솜털이라도 휘둘렀다가는 욕만 먹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를 이길 수 없다. 아니 이겨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죽어달라니 죽어주는 것.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싸우겠는가, 그렇다고 설득하겠는가.

 

그것이 대적할 수 없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인 것이다. 괜히 버텨봐야 자기만 더 상처입고 말 뿐이다. 명분도 저쪽에 있고 힘은 당연히 저쪽이 더 세다. 진보와 보수을 아우른 모든 언론을 등에 업고 전력으로 정의연을 죽이려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압력이 거세질수록 살기 위한 발버둥은 서로를 더욱 상처입히고 만다. 모두를 위해 최선은 이미 죽어주는 것 말고는 없다. 정의연의 명분과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있는데 그들로부터 거부당하고 과연 존재할 이유가 지금 남아있기나 한 것인가.

 

그래서 결론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사퇴하라. 해체하라. 자기들만 할 수 있다 여기는 것도 오만이다. 그래서 더 분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들보다 더 잘해 줄 사람들이 그 주위에 넘쳐난다. 당장 보라. 평소 관심도 없던 언론들이 보도를 쏟아내고, 오히려 적대하며 무시하던 개인이며 단체들이 편들고 나서준다. 이미 대신할 존재가 있는 이상 더이상 자신만의 선의를 고집하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 시대가 바뀐 것을 인정하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따져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서와 감정의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서운하고 억울해도 어떻게 친척들 보는 앞에서 할머니에게 솜털이라도 휘두를 수 있겠는가. 때리면 맞는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래야 풀어질 것 같으면. 

 

이미 명분은 넘어갔다. 명분도 없는데 힘까지 저쪽이 더 세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인정 없이 과연 정의연은 앞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더이상 버티기는 의미없다. 대세는 정해졌다. 안타까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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