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자본주의의 한계는 명확하다. 수요가 늘면 생산도 늘어난다. 생산이 늘고 상품이 많이 팔리면 자본의 이익이 축정되어 자본의 총량도 늘어난다. 자본이 늘어나면 당연히 생산에 투자되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런데 시장의 소비는 어느 순간이 되면 더이상 늘지 않게 된다.


10이라는 자원을 들여 20의 가치를 가진 상품을 생산했다. 중간유통과정을 거치며 상품은 30의 가치가 되어 소비자에게 팔렸다. 원래 10의 가치이던 자원이 생산자와 중간유통과정을 거치며 소비자로부터 30이라는 돈을 지불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어디선가 이 돈을 벌어와야만 한다. 당연히 그 돈은 생산자와 유통자의 소비에서 나오게 된다. 원자재를 사들이고, 노동자를 고용하고, 혹은 개인의 소비를 위해 돈을 쓰는 과정에서 소비자가 지출한 돈은 다시 소비자에게로 돌아온다. 문제는 그것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려면 생산자의 잔고는 항상 0에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사업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 은행에 쌓아둔다. 그 돈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시장에 유통되는 돈이 아니다. 생산주체들에게 돌아가는 돈이 아니다. 그냥 쌓여 있는 돈들이다. 그만큼의 돈이 빠져나가 쌓이고 있는데 어떻게 시장에서는 계속 돈이 융통되고 있을까.


실제 전근대사회에서는 화폐의 부족으로 인한 전황이 꽤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역대 많은 왕들과 조정의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기까지 조선사회에서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유통되는 화폐의 가치보다 구리의 가치가 더 컸던 탓에 그냥 돈을 녹여 구리로 쓰는 것이 더 나은 경우마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리광산이 개발되고 어느 정도 구리가 확보된 뒤로도 여전한 구리의 부족으로 인해 일부 부자들이 돈을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시장에 유통되는 돈은 턱없이 부족해지기 일쑤였다. 원래 상거래를 통해 유통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화폐가 어느 곳에서 멈춰버리고 나면 경제 전반에 가해지는 타격이 상당하다. 중국에서도 실제 상거래에 필요한 은보다 유통되는 은이 부족해지며 상당한 문제가 발생했었고, 유럽에서는 아예 신대륙을 발견하기 직전 화폐유통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래서 미국이 막대한 무역 및 재정적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인 달러의 유통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신용의 가치가 달러라는 화폐의 가치를 보증해준다. 그 신용을 바탕으로 미국은 막대한 달러를 찍어내며 시장에 유통시킨다. 그리고 그 만큼 미국은 달러를 팔고 세계의 상품들을 미국에서 소비해야 한다. 만일 세계최대의 소비시장인 미국에서 더이상 소비를 하지 않게 되면 세계의 경제는 경색되기 시작한다. 미국이 세계의 기업들로부터 상품을 사들이지 않으면 아마 적잖은 기업이 도산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일부러 재정을 동원해가며 미국의 채권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채권을 사들이는 만큼 미국은 재정을 소비하고 재정의 소비는 시장의 수요로 이어진다. 얼마든지 돈을 찍어내도 미국이라는 확실한 시장이 있는 이상 세계경제는 문제없다. 세계경제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중국이라는 대안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결국 미국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생산이 늘어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소비도 늘어야 한다. 자본의 이익이 늘어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수입 역시 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비례관계는 이론처럼 완벽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자본의 이익에 비해 임금소득은 제자리고, 그만큼 미국에서도 중산층의 구매력은 벌써 오래전부터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생산은 늘고 자본도 늘어나는데 정작 그것을 사줄 시장도 투자할 대상도 줄어든다. 그래서 터진 것이 서브프라임모기지론이다. 현재 실재 존재하는 가치에 비혜 화폐의 가치가 무려 3배를 넘는다던가. 오래전 읽은 것이니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돈이 있다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곧 생산수단인 체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본을 생산에 투자할수록 이익은 줄어든다.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의 감소다. 


어쩌면 지금의 경제위기마저 자본의 위기를 경고한 마르크스의 예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노동가치가 소외된다. 노동자가 소외된다. 그러나 노동자가 바로 시장에서 생산된 상품을 최종소비하는 소비자들이다. 노동가치란 그런 점에서 시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비용일지 모른다. 지금의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얼마의 급여를 받아야 하는가. 노동자의 임금을 쥐어짜기만 하다 보니 노동자 자신이 소비에 쓸 돈이 줄어들게 된다. 노동자가 소비하지 않으면 수요가 줄어들고 생산이 오히려 생산자에게 압박으로 작용한다. 괜히 세계의 여러 정부에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의 급여를 올리겨나 노동자의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듯 노동자의 실질소득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 모른 척 외면하고 있을 뿐.


전지구적 보수화현상은 그 반작용이라 보면 된다. 당장 내 손에 들어와야 할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 버렸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것이어야 할 이익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 분노를 발산할 대상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외부로 투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외부나, 혹은 정체적으로 외부에 있는 누군가다. 외국인이거나, 여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특정한 인종, 아니면 민족과 같은. 저들 때문이다. 저들로 인해 내가 이런 곤란을 겪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실을 알리기에는 이후의 상황을 감당하기 두렵다. 차라리 외부에 그 분노를 발산하는 것을 권장하거나 최소한 방관한다.


어차피 일을 해도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란 없다. 아무라도 아무렇게라도 원망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탓하며 미워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워하는 동안에는 그래도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그렇게해서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라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미국의 한계는 벌써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지적해 왔었다. 더이상 미국은 세계자본주의를 지탱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포기하는 순간 세계자본주의는 붕괴한다. 그나마 소련이 사라지고 자본주의를 위협할 적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글쎄...


딜레마다.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게 되면 중국의 생산도 그만큼 증가해야 한다. 소비가 증가하는 그 이상으로 생산이 증가한다. 반복이다. 과연 짧은 시간 안에 그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100년 후의 미래는 거기서 결정될지 모르겠다. 당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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