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권에서 과거가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서 천 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한 학식을 갖춘 이들만이 바르게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상을 잘 두었다는 이유로 권력을 독점하던 귀족들이 아닌, 당연히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 백성들도 아닌 충분한 학식과 교양을 쌓은 자신들 선비들만이 제대로 나라를 바르게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던가.

 

물론 유교가 추구한 것은 보편의 가치와 규범이었을 것이다. 유교가 추구한 대동사회란 왕이든 관리든 선비든 일개 무지렁이 백성들이든 각자 자신의 역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회였을 것이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다한다면 반드시 사회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유교의 가르침을 실제 행동에 옮긴 이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역사상 뛰어난 군주들과 대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익힌 선비들인데 정치를 제대로 못할 리 있겠는가.

 

그러나 아다시피 사대부란 대부분 지주들이었다. 처음에는 지주가 아니었어도 결국 관직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장원을 소유한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분적으로도 관직에 나가 권력을 쥔 이상 일반 백성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경우는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노비를 소유해야 하는 노비주의 입장이었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아무리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선비라고 맹자가 떠들어봐야 선비들 역시 대부분 그냥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장 내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욕심인 것이다. 땅이 있으면 넓히고 싶고, 노비가 있으면 늘리고 싶고, 신분이 있으면 강화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 그럴 수 있는 힘이 자신들 손에 쥐어진다.

 

세상의 범죄 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것이 직접 법을 만들어 강제하는 것이다. 법을 자신들이 정할 수 있으니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철저히 이익에 충실하게 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 강제한다. 그 결과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문화권의 전근대의 역사인 것이다. 중국문화권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무역과 관련한 대부분 법률은 실제 무역에 종사하는 대자본가들의 영향력 아래 제정되고 있었다. 왕과 국회는 단지 국부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그들이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돕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었다. 귀족이 귀족을 위한 법을 만들고, 군인이 군인을 위한 제도를 만들고, 상인이 상인을 위한 정책들을 세운다. 얼핏 합리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군인들에 의해 세워진 고려의 무신정권은 그러나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정권을 지키기 위해 그 군사력을 아껴두고만 있었다.

 

민주주의와 문민통제는 그래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영국에서 시작된 초기의 민주주의는 문민통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었다. 투표권도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주어졌으며, 따라서 의원의 선출부터 입법과 정책수립까지 모든 것이 그들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란 나라는 그들 소수의 특권층만이 사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소수가 모든 특권을 독점하는 사이 오히려 영국사회는 더욱 피폐해져갔고 수많은 사회문제까지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위한 더 나은 최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상관없는 필부필부의 의견이 정치에 책임과 함께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많은 대수롭지 않은 다수의 참여와 그에 근거한 책임정치만이 사회를 보다 낫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오진을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도, 환자를 상대로 강간을 저질러도 잠시 면허가 취소되기는 해도 일정 시간만 지나면 다시 발급받을 수 있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한 의대생들에 대해 교수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니 잘 대해주라 말한 것을 떠올려 보라. 그냥 자기들끼리 동의하고 합의하면 그것으로 그들의 기득권은 언제나 유지된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이 무고한 이를 죄인으로 몰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했어도 검찰이란 조직의 이익에만 충실하면 불이익을 보는 일따위 거의 없다 보면 된다. 검사 그만두고 나가도 변호사로 개업해서 전관예우까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그래서 판사와 검사는 한 몸이란 것이다. 그에 비하면 대통령은 어떤가.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이야 반발하든 어쩌든 아랑곳않고 진료거부를 계속할 수 있는 의사들에 비해 국민의 생명이 우선이라 정부는 계속해서 양보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판단과 결정의 권한을 주는 것이 옳을 것인가.

 

국민은 의사를 심판할 수 없다. 검사나 판사 역시 심판할 수 없다. 국민이 오로지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정부와 국회 뿐이다. 그런데 그 정부와 국회가 법이란 수단을 통해 의사와 검사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 비전문적인 집단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어도 최종적으로 그 책임 역시 정부와 국회가 질 것이며 그에 대한 판단은 결과를 보고 국민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민통제다. 그렇다고 과연 정부와 국회가 이들 전문가집단들에 비해 비전문적인 아마추어들이기만 한가. 의료정책에 가장 전문가는 누구일까? 사법정책에 있어 가장 전문가는 누구일까? 검경수사권과 관련해서 가장 전문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집단은 또 어디의 누구일까?

 

그런데 그게 싫은 것이다. 말은 교묘히 꼬고 있지만 결국은 정부 위에 있는 국민을 비롯한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엘리트다. 나는 그만한 자격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 현실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과연 정부의 압력을 제거하면 의사들이 오로지 국민만을 위한 공익적 판단을 내리려 할 것인가. 확실히 의협이든 언론이든 보수정당이든 앞으로 최소 10년은 정권교체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보수야당 출신 도지사와 광역시장이 있는 경북과 대구에서 시민단체가 추천해서 선발한다면 현정부와 가까운 이들이겠는가. 아니면 오히려 현정부에 적대적인 이들이겠는가. 부산시장은 국민의 힘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가져갈 것이 뻔하니 그쪽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어째서 현정부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제도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래야 정부에 인격을 부여하고 개별화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 정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국민이란 사실을 철저히 배제한다.

 

지금 정부가 뭣같이 정치를 하면 바로 다른 정치세력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의회에서도 다수당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결과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에 대해 심판받고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정부의 정책과 환자따위 아랑곳않으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반복하는 의사 가운데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대민주주의는 전문가가 아닌 철저히 시민에 의해 모든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리고 심판까지 하는 문민통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게 만들기 위해서? 한 마디로 자기들이 전문가니까 자기들 떠드는대로 정부가 따르게 하기 위해서란 뜻이다. 서민이란 기생충이 저리 미쳐 날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않던 권력비판의 사명감에 도취되어 한겨레와 경향을 비롯한 언론들이 지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한 바 있다. 왜 내 말을 안 듣는가. 내가 옳고 내가 바른데.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그것이 시민과 국민을 위한 정치인가. 넘어가는 놈들이 너무 많다는 게 안타깝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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