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학교다닐 때 화백제도에 대해 다들 배웠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통이네 어쩌네 하지만 사실 하나의 국가로서 체계가 잡히기 전까지 인류사회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적용되던 제도였었다. 한 마디로 나 수틀리면 여기서 나갈 테니 나 빼고 결정할 생각 따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다 12지파가 어떻게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뉘게 되었을까. 원래는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서로 마음이 맞지 않고 이해가 갈리니 그냥 돌아서서 각자 나라를 세우고 따로 살았던 것이었다. 고대의 역사라는 게 원래 그랬다. 로마도 각각 일곱 개의 언덕에 나누어 살던 씨족들의 연합체였었고, 신라는 사로 6촌이라는 여섯 마을이 연합하여 세워진 나라였었다. 이웃한 가야 역시 김수로가 9촌을 연합하여 6가야를 세웠다 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게 중요하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강했다면 정복이나 병합이 되어야 했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연합이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나머지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하나를 찍어 누르는 것이야 일도 아니기는 하다. 그렇게 하나둘 내부에서 제거되고 최종적으로 한둘의 거대집단이 지배세력으로 올라서는 경우도 역사에는 매우 흔하다. 하지만 구성원들 자신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반발하고 박차고 나갔다는 이유로 일일이 응징하다가는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지 모른다.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반대하고 돌아선 것인데 그마저 힘으로 찍어누르려 해서는 언젠가 자신 역시 이익이 안되는 일을 강요당해야 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럽의 봉건제도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가신들 너희 당대에만 세금 거둬 쓰고 죽으면 돌려놓으라 했더니만 자기들끼리 작당해서 그냥 자식들에게 물려줘 버렸다. 힘으로 응징하렸더니 그 군사력 자체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봉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장일치제가 채택된 것이었다. 아무리 연합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되는 일이라도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안하겠다.

 

그래서 만장일치였다. 각각이 독립된 주체들이었다. 공동체에 속해 있기보다 각자가 배타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단지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에 함께 연합을 구성한 것이었다.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박차고 나간다. 손해가 된다면 바로 반대하고 돌아선다. 그래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그럴만한 수단도 없고 명분도 서지 않는다. 아무리 연합을 위한 일이라지만 한 집단을 대표하는 수장일 텐데 어찌 불이익을 받아들이라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만장일치가 일부의 반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거나 밀어붙일 수 있게 된 것은 아직 독립된 주체였던 그들이 공동체라는 공공의 이해 속에 편입되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늦은 시기다. 유럽만 해도 근세까지 각 지방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고, 조선 역시 조선건국 이후 상당기간 동안 따로 노는 지방들의 이해를 관리하기 위해 지방관들에게 절대에 가까운 권한을 부여해야만 했었다. 부민고소금지법이 그렇게 나오게 된 것이었다. 국가가 정한 일이고 국가 전체를 위한 일이니 늬들이 좀 손해가 되고 피해가 되더라도 참고 따르라. 그럴 수 있는 강력한 중앙권력도 출현했다.

 

지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말 좀 한다는 놈들이 하나같이 떠드는 '독재'란 말의 정체란 것이다. 민주주의는 협의지 합의가 아니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의회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인도 절반 가까이 있었다. 중국과의 전쟁에 대한 찬반투표 결과가 각각 찬성 271표, 반대 262표였었다. 고작 9표 차이로 반대하는 이가 이렇게 많았음에도 영국은 청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독재라고 주장하는 놈들의 말대로라면 당시 영국은 독재정 아래 있었어야 했다. 아니 과연 역사상 아주 고대를 제외하고 만장일치란 것이 있기나 했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화하고 협의하고 각자 양보하고 타협하다가 그래도 도저히 안되겠으면 표결에 붙여 다수결로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민주주의 아니던가. 그러라고 국민들이 일부러 시간 내가며 국회의원 뽑아서 의회로 보냈던 것이었다.

 

의료정책에 있어 당사자는 의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병원장들도 있고, 간호사들도 있고, 한의사들도 있고, 그밖에 각각의 직군과 계층과 혹은 지역사회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체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도 공급자와 가입자, 공공대표 해서 각각 8명씩 균형을 이루어 서로의 이해를 최대한 절충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의사대표가 2명이니 너무 적다는 것은 의사만이 의료정책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인가. 의사에게 불리한 의료정책은 다른 주체들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의사가 반대하니 하면 안되고, 의사가 주장하는 정책만 집행해야 한다. 뭔 말이겠는가. 자기들은 국가보다 국민보다 더 위에 있다.

 

이미 현정부 출범 당시부터 자칭 진보와 자칭 보수들은 끊임없이 현정부를 출범시킨 지지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저주해 왔었다. 서민이 아예 늬들은 정치에 관심도 가지지 말고 투표도 하지 말라 말한 것은 사실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저들이 한결같이 떠들어 온 내용인 것이다. 한낱 너희같은 무지렁이가. 너희같이 편향적이고 무지하고 폭력적인 찌그레기들이. 생각도 내가 하고, 판단도 내가 하고, 결정도 내가 해야 한다. 최소한 우리가 해야 한다. 그 우리 안에 서울대도 가지 못한 대부분 국민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말했지 않은가. 저들이 그토록 유시민과 조국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이유가 감히 서울대 출신이 서울대도 아닌 고졸과 경희대 출신을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같은 이유로 서울대 출신들은 이낙연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편이다. 서울대라면 모름지기 윤석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족이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게 몸으로 막아서면서 오히려 큰소리칠 정도는 되어야 서울대 출신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같은 맥락인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피를 이은 성골이니 상관없다. 이명박 역시 고려대라면 그래도 서울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명문대라 할 수 있고, 무려 현대건설에서 자수성가로 회장까지 지냈던 사람이었다. 아마 문재인 대통령도 인권변호사 말고 김앤장 같은 대형로펌에서 대기업의뢰만 받아서 수 백억 자산가가 되었다면 태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어딜 감히 경희대 따위가. 어딜 감히 시골 변호사 따위가. 그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국민따위. 여전히 지지하는 지지자들따위. 그러니까 정치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서울대 출신에 교수라는 직함도 갖고 언론이 받아써주기도 하는 나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나같은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 내가 하자는대로 해야 한다.

 

차라리 박근혜가 문재인보다 나았다는 것은 비단 서민만이 아닌 한겨레 기자도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란 것이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저리 환자를 인질로 잡고 지랄하는데 정의당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의사는 그래도 되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어렵게 공부해서 의대 들어갔고 의사고시까지 치러 의사면허까지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부는 그런 의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의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간호사는? 한의사들은? 병원장들은? 각 지역주민들은? 그래서 의사들이 수능성적을 들고 나온 것이다. 어째서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설득당했다. 그래도 이 사회에서 엘리트라는 의사들이 주장하는데 어째서 정부는 듣지 않는 것인가.

 

그러니까 자기들이 검사라서. 자기들이 기업가라서. 자기들이 임대인이라서. 자기들이 기자라서. 자기들이 언론인이라서. 자기들이 정치인이라서. 자기들이 지식인이라서. 공동체를 위해서 손해를 보기보다 차라리 다른 이를 인질로 삼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관철시키려 한다. 그런 요구들을 정부가 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어주지 않으니 독재다. 뭔 말인지 알겠는가. 부족사회의 마지막에 각 족장들을 굴복시키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군주를 향한 비난과 그리 닮아 있다는 것이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그리 포악을 부렸었고, 의자왕 역시 가장 전성기에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실정을 했었다. 나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조금도 양보하거나 희생할 생각이 없으니 절대로 정부는 자신들의 입장만을 지켜주어야 하고 자신들의 주장에만 동의해야 한다. 아니면 독재다. 협의가 아닌 합의다. 그보다는 복종이다.

 

하긴 원래 독재란 연합정권이다.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 그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다른 주체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 줄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독재자들도 기꺼이 권력을 양보한다. 그렇게 언론이 권력이 되고, 의사도 권력이 되고, 지식도 권력이 된다. 그렇게 하자. 국민은 안중에 없고. 어차피 편향적이고 무지하며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일 테니. 국민이라고 해봐야 혼자서는 진단도 못하고 처방도 못하는 버러지들일 것이니. 그러니 내 말만 들으라. 의사가 대중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 이유다. 대부분 1등급이 못되는 국민들을 향해 수능 1등급 말고는 가치가 없다는 말을 태연히 할 수 있는 무리들이다.

 

저들의 솔직한 속내인 것이다. 그러므로 협치를 하자. 합의를 하자. 내 말을 들어 정치를 하자. 내 말만이 가치가 있으니까. 아니면 박차고 나갈 텐데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돌아서서 싸우자고 할 텐데 네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만한 힘이 자기들에게 있다 생각한다. 더구나 서로 손잡고 연합한 지금은. 검찰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든든한가 말이다. 정의당에서 검찰개혁 이야기가 완전히 사라진 이유다. 어째서 저들을 버러지라 불러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처음부터 저들은 한 몸이었다 말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논쟁하더라도 자기들끼리 한다. 개혁과 수구로 나뉘어 싸우더라도 자기들끼리 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래서 민주당보다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을 선택한다. 세월호마저 기꺼이 부정할 수 있다. 그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새로울 것 없는. 그 끝에 의사가 있는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