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조선중후기가 배경일 고전소설 '장화홍련'에서 장화와 홍련 자매가 아버지의 후처인 의붓어머니와 동생 장쇠에게 살해당한 것은 다름아닌 자매의 친어머니가 남긴 적지 않은 재산이 원인이 되고 있었다. 장화와 홍련 자매의 친어머니는 돌아간 부모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었는데, 두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남편이 아닌 두 딸이 상속자가 되어 후처와 자식들과는 상관없는 재산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장화와 홍련이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자매의 자식들에게 물려지게 될 뿐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장쇠의 몫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무렵이 하필 재산은 당연하게 아들에게 물려지는 것이란 인식이 자리잡아가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조선중후기라면 '장화홍련전'의 공간적 배경은 조선에서도 변방이었던 함경도였었다. 조선사회의 변화가 가장 늦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이미 조선 중기에 이르면 조선에서도 장자상속이 정착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장화홍련전의 배경은 거의 조선 후기에 가깝다. 아마 17세기 아니면 18세기 쯤 될 것이다. 거의 후기다. 그러고보면 '흥부전' 역시 형 놀부와 부모로부터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받았다가 부당한 강압과 강요에 그 재산을 모두 빼앗긴 동생 흥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는 당시까지 부모로부터 재산을 골고루 물려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결국에 장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며 차남 이하는 원래 자신들이 받을 몫을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대중의 무의식을 다룬 소설이 아니겠는가. '장화홍련전' 역시 하필 사회적 변화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던 함경도를 배경으로 장자상속과 균분상속이라는 관습의 공존으로 인한 혼란과 비극을 다루고 있었다. 아내의 재산은 곧 남편의 재산이고,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이 물려받는다. 어머니의 재산이라고 딸이 물려받아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다. 다만 '장화홍련전'의 판본이 전해지는 가운데 장자상속이 완전히 정착되어 버린 결과 그 살해의 동기는 이후 묻히고 말았다.

 

사실 인류역사를 보면 장자상속은 오히려 매우 늦게 나타난 제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프랑크 왕국의 경우는 세 아들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나라 자체가 쪼개지고 있었을 정도로, 굳이 나라까지 쪼개지 않더라도 영토를 나누어 영주로 임명함으로써 일정한 지위와 재산을 보장해주는 경우가 봉건사회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의 장미전쟁도 그래서 공작으로 임명받은 전왕과 전전왕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서로 싸우며 시작된 것이었고, 프랑스 왕실 역시 왕과 피로 이어진 고위귀족들로 인해 항상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긴 이게 원인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유력 다이묘들이 자식들에게 신분과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으로 자기 영향력 아래 있는 가문에 양자로 보내 상속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모리씨의 아들이 깃카와가 되고 고바야카와가 되었던 이유였다. 이미 있는 가문의 영지를 나누면 힘도 약해지고 서로 상속받겠다고 싸우다 망하는 상황까지 벌어질지 모른다. 

 

유럽 중세의 초기만 하더라도 유력 영주들 가운데 자식들에게 고루 영지를 나누어주는 경우가 없지 않았었다. 정확히 한 명의 자식에게 - 특히 혼란이 없도록 장자에게 물려주는 제도가 의도적으로 정착되었다기보다 적자생존의 경쟁과정에서 아들들에게 고루 영지를 나누어주던 영주들이 몰락하며 도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천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영지를 아들 셋에게 각각 330명씩 모을 만큼 나누게 되면 결국 각각의 아들들은 600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는 이웃한 약소영주보다도 약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세대가 지나면서 또 더욱 그 자식들에게 나뉘어지게 되면 더 약해지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문을 위해서라도 가문을 물려받을 장자 이외에는 없는 자식으로 취급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차남은 성직자가 되어 나름대로 가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삼남 이하는 장남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발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조차도 대를 이어가면 의미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가문의 힘이 온전히 장남 한 사람에게 물려져 가문이 다른 가문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 있다.

 

조선후기 양반사회를 정의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문벌이다. 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조선후기에 이르면 오히려 붕당의 의미는 약해진다. 어떤 당파인가보다 어떤 가문의 소속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원래 조선의 붕당이란 것은 퇴계나 남명, 화담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맥에서 이어지는 것이었을 텐데, 그래서 숙종대까지 붕당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자손인가 하는 것보다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하는 것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전부터도 그런 경향이 보이긴 했지만 영정조대에 이르면 확실히 사대부들도 가문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정확히 당시의 왕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족 단위로 등용하여 쓰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래서 당시부터 양반사회는 붕당이 아닌 왕과의 친소, 물리적인 거리까지 포함한 벌열이나 향반이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영남의 유림들이 보리문둥이라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면 과연 이처럼 가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키우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전처럼 출가외인인 딸에게까지 재산을 나누어야 할까? 아들도 하나에게만 물려주어야 할까?

 

우리 할아버지가 종가집에서 머슴 비슷하게 살았던 이유였었다. 종가와 갈라진 것은 그보다 몇 대 위였는데 재산도 무엇도 없이 그냥 성씨만 물려받아 인근에서 살다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는 들어가서 허드렛일이나 도우며 살았던 것이었다. 정확히 양반이 아니었다. 양반이려면 이전 3대 가운데 과거급제자가 있어야 했는데 부쳐먹을 땅도 없는 처지에 과거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럼에도 같은 문중이니 어려서 글공부는 하도록 해주고, 먹고 살 방편도 마련해 주었지만 딱 거기까지였었다. 할머니도 당시 종가에서 중신을 서주어 혼인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조상이 양반이었다고 자기도 양반이라 말하는 것은 당시 조선사회를 기준으로도 성립하지 않는 말이란 것이다. 오로지 장자만이 집안과 재산을 물려받고 신분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그냥 조상이 같고 성씨가 같은 다른 신분의 일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야 조정에서 벼슬 같은 건 꿈도 못꾸는 시골양반이라도 동네에서나마 신분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장남 이외에는 혹시라도 장남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예비 이외에 그냥 없어도 그만인 잉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귀족이든 양반이든 신분을 물려받지 못하고, 같은 조상을 두었을 뿐 세대가 지나면 그 신분마저 나뉘게 된다. 귀족에게 양반에게 귀족이 아니고 양반이 아닌 이들의 존재란 어떤 의미이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아예 분란의 소지를 없애겠다고 차남 이하에서는 아예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도록 강요하는 경우마저 상당했었다. 괜히 차남을 성직자로 만드는 게 아니란 뜻이다. 불교나 가톨릭에서 성직자는 공식적으로 후계를 이을 자식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가문 안에서는 희망이 없으니 다른 곳에서 길을 찾아 보겠다고 온통 중세사회를 들쑤시고 다니던 골치덩이들이었을 것이다. 막말 일본에서 유명했던 신센구미에도 그래서 차남이나 삼남들이 그리 많았었다. 물론 당시는 거의가 독신이었었다. 지금의 출산률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가문은 의미가 없지만 내 자식이란 의미는 있다. 내 자식이 남들과 경쟁해서 번듯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그런데 지금 사회구조 안에서 모든 자식을 그렇게 키우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부모들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삶의 수준이란 것이 있을 텐데 모든 자식들이 그런 수준에 이르도록 기르고 가르치기란 불가능하다. 안정된 직장 없이.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서 보면 정규직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결혼률이나 출산률이나 그다지 낮지만 않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매우 높다. 다만 그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이, 특히 젊은 세대가 이미 이 사회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세대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남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을 만큼 키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포기한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의미없는 일이다.

 

그냥 낳아서 기르기만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란 것이다. 남들만큼 먹이고 입히고 무엇보다 가르쳐야 한다.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이미 거의 없으니 상당한 재산과 지위와 신분까지 물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도 결혼하면 아파트 한 채는 해 주어야 한다. 물려줄 재산도 있어야 한다. 내세울만한 직업과 신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답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다. 모든 국민이 경쟁할 수 있을 만큼의 신분과 직업과 재산을 가지게 하던가, 아니면 경쟁에 목매지 않는 사회를 만들던가. 그냥 부모가 낳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 부모에게서 받지 않아도 사회로부터, 혹은 자신이 쟁취해서 얼마든지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거의 혁명수준이다. 지금까지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의식까지 모두 근본부터 바꿔야만 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목숨 걸고 좋은 직장에 목을 매고 그래서 남들만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자식을 이유로 피를 나눈 형제까지 서로 틀어져 다시 보지 않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남들에 내세울만한 자식이니까. 그보다 못한 부끄러운 내 자식일 테니까.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지금은 출산률이 더 높은 이유이기도 할 테고. 일본보다 개인화가 덜 되었다. 아직은 타인을 의식하며 그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방법을 알면 내가 뭐라도 했겠지. 어렵다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