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의 편에서 뭔 글을 쓰든 항상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나 자신이 노동자다. 고작 25만원짜리 반지하 월세에 사는, 얼마전에 무기계약직 되었다 그저 좋아할 뿐인 이 사회의 바닥을 이루는 수많은 노동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나 자신의 말과 글은 증명되는 것이다. 더이상 추가적인 증명 따위 필요 없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주장도 하는 것을 나의 신분이 증명해 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 노동자로서 사회적 약자로서 이런 주장들을 한다. 그래서 그 잘난 자칭 진보들이 나보다 더 나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문득 생각했다. 자칭 진보들은 어째서 저토록 도덕적 결벽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일까. 어째서 단 한 점의 오류도, 의혹도 모두 거부하고 부정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그로써 자기를 증명하려는 강박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나는 이만큼 도덕적으로도 엄격하기에 사회의 정의와 진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상관없는데? 몇 번이나 썼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비루함에 대해서. 힘없는 이들의 비굴함과 비겁함에 대해서도. 얼마나 그들은 쉽게 자신의 양심을 도덕을 윤리를 약간의 이익과 바꾸고 마는 것인가. 약자가 선량하다는 것은 강자가 만든 올가미와 같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선량에서 벗어난 순간 약자는 약자로서 자격을 잃게 된다.

 

아마 성소수자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사회적 규범에 충실할 때만 존중과 인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일반적인 상식에서 불쾌하고 혐오스런 행동을 하더라도 성소수자라는 이유 자체로 그들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항상 올바른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성소수자 역시 온전히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라면 마땅히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항상 모든 개인이 보편적으로 제시된 기준을 오로지 충족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그래야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차별의 이유다. 미국의 백인들이 그냥 아무 이유없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백인이라도 이탈리아인이나 아일랜드인을 차별할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그 이유란 것들은 엄격한 사회의 도덕률이다. 같은 백인들도, 혹은 잉글랜드계나 독일계의 백인들이라도 흔히 범하는 잘못들인데 오로지 그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그래서 차별이라 부르는 것이다. 차별이란 어쩌면 상대를 부당하게 비하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인지 모른다. 여성에게만 혼전순결을 강요하던 전근대사회의 윤리처럼. 여성에게만 이성에 대한 절개를 강요하던 전통사회의 도덕처럼. 오로지 여성에게만 딸로써 아내로써 어머니로써 자격을 강제한다. 그래서 여성은 차별받아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가 강요한 도덕적 기준을 철저히 지켜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자칭 진보의 도덕적 결벽증에 대해 최근 느끼는 지점들이다.

 

자칭 진보가 민주진영과 수구진영을 비판하는 도덕적 기준이 전혀 다른 이유인 것이다. 말 그대로 강박이다. 수구진영에 대해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던 도덕적 잣대가 민주진영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들이밀어진다. 그래야지만 자신이 진보일 수 있다. 진보로서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누구의 기준인가? 누가 그렇게 강제하는가? 정확히 자신이 진보라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진보적 가치를 주장해도 좋은 것인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사회의 보편적인 믿음과 때로 상반되는 주장을 서슴없이 펼쳐도 좋은 것인가. 그래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저들이 제시한 기준을 지키려 한다. 결론은 스스로 노동자도 소수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그들의 편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전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며 내린 결론이었다. 저 놈들은 자신들을 무지렁이 노동자 농민과 다른 존재로 여기고 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스승이거나 선도자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저들과 자신은 다르다. 정의당 한 번 제대로 털면 재미있을 것이라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원래 노동자도 약자도 소수자도 아니면서 그들의 편에서 사회의 주류와 맞서 주장을 펴야만 한다. 그러니 저들이 인정할 수 있는 자신의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는 마땅히 더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를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제물은 당연히 진보에서도 주류가 못되는 민주당이다.

 

내가 자유롭게 민주당의 편을 들 수 있는 것과 달리 홍세화나 김규항 등이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말을 하는 것을 스스로 꺼리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노동자다. 노동자로서 노동자라는 자신의 계급과 신분을 위해 주장하는데 다른 증명이란 것이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스스로 주체라 동지라 공동체라 여기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욕하면 욕하는대로 듣는다. 비난하면 비난하는대로 듣는다. 그런 허튼 주장들에 구애되기에는 그 모든 주장들이란 절박한 자신의 사정인 것이다. 대학교수라도, 기업경영자라도, 전업정치인이라도 그런 주장들이 모두 자기의 일인 양 절박한 현실로 여겨지는 것이다.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전혀 아프지 않다. 그래서 우상호가 박원순을 계승하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이 절박한 일들을 실제 행동에 옮기려 한다.

 

타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억지로 노동자를 위하고, 인위로 약자와 소수자를 위하려다 보니 그 괴리를 어떻게든 메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자기가 진보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항상 확인받으려 한다. 정의당 털어보면 진짜 재미있을 거라니까. 녹색당도 내부사정 들여다 보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 내가 잠시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고 내린 결론이다. 차라리 태극기가 나와 계급적으로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적 김규항인지. 발전도 변화도 거의 없다. 자칭 진보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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