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느 선비가 먼 길을 떠났다가 우연히 외지고 허름한 초가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밤늦게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보니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는데 그리 습관적으로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집주인을 위하는 마음에 선비는 그날 밤 집주인이 습관적으로 떨던 다리를 자르고 냅다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글 중간에 나오지 않았는가. 발을 떨어 복이 달아나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기에 떨던 다리를 잘라준 덕분에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더라. 당시에도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여겼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성공해야 하는 존재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하는 이유는 높은 자리에 올라 큰 권력과 명예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과 명예는 모두가 그를 위해 노력해 온 시간들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같은 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그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 더 가난하고 더 비천하고 더 비참한 삶을 살아야지만 더욱 노력해서 성공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인류사에서 거의 보편의 법칙처럼 믿어져 온 이야기일 것이다. 당장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 와중에도 혹시라도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형편이 될까 구휼을 자제한 것이 바로 19세기의 일이란 것이다. 당시의 복지란 것도 그래서 딱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보다 못한 정도로만 그쳐야만 했었다. 그래야 스스로 노력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하긴 지금 당장도 복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 하면 바로 나오는 말이 복지가 지나치면 스스로 노력해서 잘 살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가 약해질 것이란 경고일 것이다. 가난하다고 그저 나라에서 도와주려고만 하면 열심히 일하려던 사람들까지 그런 것을 보고서 더이상 일해야 할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복지만 바라고 게을러지며 가난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살도록 채찍질한다는 의미에서 가난은 더욱 고통스럽고 비참해야만 하고, 그런 모습을 열심히 노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항상 어렸을 적 자식들에게 그리 말씀하시고는 하셨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데 이른바 취업준비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며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기는 공항 보안요원들과 같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온 것이었다. 공항 보안요원들처럼 비정규직이 되어 차별받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가며 지금껏 열심히 노력해 온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구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한 탓에 고작 비정규직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벌받는 모습을 자기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껏 노력해 온 그동안의 시간들이 허무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벌을 주는 것이 정의란 것이다. 신상필벌이라 한다. 그동안 자신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양보해가며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이 있어야 하고, 저들이 그렇지 못한 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정의고 그런 것이 공정이다. 노력도 안했는데 정규직이란 보상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특혜이며 불공정이다. 그저 큰 노력 없이 계약직 보안요원에 만족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정규직이란 보상을 누리게 하는 것은 불의이고 죄악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이다. 정규직이란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보상인데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할 대상들에게 그런 특혜를 주려 한다. 그런데 묻고 싶다. 겨우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 너희는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라 말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 것인지. 상처주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란 것인지.

 

어째서 체육계에서는 체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체육계만이 아니다. 군대내 따돌림과 가혹행위로 끔찍한 총기사고가 일어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직장에서도 상사와 동료의 괴롭힘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그동안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대개 같다. 너무 못해서. 너무 정상에서 벗어나 있어서. 그래서 잘하라고.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선의에서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폭행과 가혹행위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집단의 암묵적 동의와 연대에 의해 이루어지고는 한다. 후회조차 없다.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저가 약하고 저가 무능해서 저가 남들과 달라서 그리 된 것인데 괜히 죽어서 다른 사람 곤란하게 만든다.

 

드라마 '송곳'에서 아주 명대사가 있었는데. 사람이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못사는 건 죄가 아니다. 남들만큼 노력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어느 법전에도 그런 내용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성공해야 하는 사회니까. 모두가 성공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하는 사회였으니까. 그러므로 성공은 정의다. 성공하지 못한 삶은 악이다. 성공은 그만한 보상을 누려야 하고 성공하지 못한 삶은 그에 따른 징벌을 받아야만 한다. 인천공항공사 정규직전환 논란과 최숙현 사건의 본질을 같이 보는 것이 비단 나 하나 뿐일까? 당사자가 상처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는 일을 폄하하고, 그동안의 삶을 비하하고, 인간 자신마저 서슴없이 모욕한다. 인천공항공사 보안요원들을 향한 인터넷의 정의로운 여론을 너무 적나라하게 직접적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리 다르다 여기는 것일까?

 

그저 고통받지 않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 것이다. 그저 스스로 비천하다 여기지 않고 비참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존엄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땅히 이 정도 삶은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매맞지 않고, 모욕당하지 않고, 곤궁하지 않으며, 불안해하거나 위태로워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몇 년 뒤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대단하게 많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계획을 세워 어떻게 잘만 하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정도가 생기는 것 뿐이다. 선수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면 결과로써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아니 선수를 그만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만 모든 것을 걸고서 온갖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따위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못하면 못한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목적은 인간 자신이다.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었을 텐데. 하지만 인간은 수단이다. 인간에게는 더 가치있는 원대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를 이룸으로써 인간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고작 정규직인데. 그냥 평범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운동하며 살고픈 것 분인데. 악의조차 없다는 것이 더 비참하다. 오로지 선의로 정의감에 그리한 것이란 사실이 더 참혹할 것이다. 인간을 벌주어야 한다. 내가 잘되고, 네가 잘되고, 모두가 잘되기 위해서. 그것이 정의고 공정이다.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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