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선의는 선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선의 역시 선의일 수 없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선의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상대가 바라는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선의만을 강요하지도 않겠다. 결국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인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동의했지만 오늘부터 더이상 동의하지 않겠다. 어제까지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방관했지만 오늘부터는 그조차도 용납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원하는대로 방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바꿀 수 있다면 상대가 동의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부터 해나가면 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그때는 가만 손떼고 상대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대신해서 그를 돕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자기가 지금까지 최선이라 여겨왔던 것이 정작 당사자에 의하 부정당하고 거부당한다면 그때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벌써 몇 번 째 반복해서 떠들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정의연의 선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동안 피해자들로부터도 충분히 인정받아 왔음도 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정의연의 해체를 말하기 전에는 나 역시 정의연이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계속 활동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 자신이 정의연이라는 존재 자체를, 그동안의 활동까지 모두 부정한 순간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동안 피해자 가운데 정의연의 활동에 동의하며 함께 연대했던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들이 그러기를 거부한 이상 그들의 활동은 피해자들과 분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이상 정의연의 활동은 피해자들의 동의 없는, 피해자들과의 연대도 없는 그들만의 활동이 되어야 한다. 그럴만한 근거와 정당성이 정의연에 있는 것인가.

 

지금 이용수 할머니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더 잘하라는 것이 아니다. 해체하라는 것이다. 사퇴하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두라는 것이다. 더이상 정의연도 윤미향 당선인도 자신은 용납할 수 없다. 더이상 자신들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버틴다. 그런데 악착같이 버티며 해명을 한다. 오해를 풀겠다며 수많은 이유들을 대고 있다. 그 모습도 구차하기만 한데, 더구나 그로 인해 자칫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정작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를 적대하며 비난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고약한 것은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이 버티고 있으니 이용수 할머니를 편들겠다며 조금이라도 정의연을 지지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협박하는 이들까지 늘어나고 있다. 결국 그렇게 같은 사안을 가지고 서로 죽일 듯 적대하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그래서 잘 안 된다면 그때 다시 나서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면 그와 별개로 따로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피해자들을 지우는 것이다. 정의연에서 피해자들을 없애는 것이다. 더이상 정의연은 피해자들과 상관없는 단체다. 그러므로 더이상 정의연은 존재할 의미를 잃었다. 정의연이 사라진다고 정의연이 추구하던 가치와 목표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활동가들이 남아 있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또한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와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연의 존립근거가 피해자들의 동의와 지지였다면 이제는 피해자들 없이 자신들만의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그 전에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한대로 지금까지의 정대협으로부터 이어진 30년 동안의 시간은 끝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며 도리다.

 

더이상 반론조차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해를 풀겠다고 내놓는 변명들조차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판단하고 결론을 내렸다. 어찌되었거나 정의연은 잘못했고 더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확인까지 해 주었다. 정의연이 존재하는 이유가 피해자들 때문이라면 그로부터 이토록 철저히 부정당한 지금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언론의 보도 가운데 말도 안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반론해도 정의연의 해체주장에 대해서는 반박조차 않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 옳으니까. 이용수 할머니가 그리 주장했고 그에 동의하는 또다른 피해자가 있는 이상, 굳이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피해자들조차 한 명도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정의연에 다른 선택은 없는 것이다. 

 

해체해야 한다. 해체만이 답이다. 윤미향 당선인도 사퇴해야 한다. 정의연의 활동은 실패했다. 안성 쉼터를 손해보고 판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의 믿음을 잃고 반감까지 사고 말았다. 정작 피해자들을 위한다면서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모든 활동의 정당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과연 피해자들의 지지 없이 얼마나 정의연은 지금까지의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국민적인 지지아래 힘있게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모든 것을 일단락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현실론이면서 명분론이다. 더이상 정의연에 출구란 없다. 이용수 할머니가 저리 강경하게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이상 정의연에게 어떤 명분도 정당성도 최소한의 설 자리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고집하는 것은 너무 추하다. 벌써 안쓰러운 것을 넘어 구차하고 비루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서 언론의 의혹들마다 모두 반박하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일 것인가. 정작 피해자들이 정의연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정의연이 이용수 할머니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앞에 있을 수도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정의연은 실패했다. 존재할 명분도 정당성도 모두 잃었다. 할머니들의 지지를 잃은 것은 정의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윤미향 한 사람 비례대표가 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 것인가. 아무리 자신들이 선의라고 생각해도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냥 고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단이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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