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란 말 그대로 남들보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다. 당연히 얼굴을 볼 일이 없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사람들은 리더의 뒷모습만 봐야 한다. 리더의 뒷모습만 보며 리더가 가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리더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하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쉴 때, 그리고 하나는 뭔가 잘못되어 사람들의 의견을 구할 때, 그러나 그런 상황에조차 리더는 온전한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에 보여서는 안된다.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였다. 감히 자신의 속내를 엿보았다. 감히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다. 군주는 두려움과 경탄의 대상이어야지 이해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이해하려는 순간 군주는 신하와 같은 눈높이로 내려오게 된다. 신하가 군주를 이해하고, 군주가 신하를 이해하고, 그 순간 신하는 더이상 군주에게 복종할 수 없고, 군주 역시 더이상 신하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래서 군주는 무오류의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명백히 틀린 순간에도 절대 군주가 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올린 것은 선조 자신이었음에도 아주 오래전 만호로 추천한 것을 빌미로 류성룡이 그를 천거한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 써야 했었다. 죄인 이순신을 수사로 올린 것은 선조가 아닌 류성룡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벌써 수 년 전부터 선조는 이순신을 눈여겨보고 중용하려 하고 있었다.

 

카리스마란 한 마디로 자발적 복종이다. 알아서 상대를 리더로 인정하고 그 아래서 자신의 모든 판단과 결정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 때때로 얼굴을 마주하고 상의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다. 기꺼이 그로 인한 모든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유비가 그토록 수도 없이 패배를 겪고 끝내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였다.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유비란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해가 아니다. 이해였으면 유파처럼 도망쳤거나 진군처럼 일찌감치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고 말았다.

 

내가 여기서 이해하네 어쩌네 말하는 자체가 정치인으로서 굴욕일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이해라는 말에는 연민이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를 어느 정도 낮추어 보기에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해서도 자기 기준으로 이해란 것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항상 옳을 것도 기대하지 않고, 맞을 것이란 생각도 가지지 않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틀릴 것을 전제하고 어째서 그래야 했었는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려 한다. 리더인가? 그런 사람을 끝까지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길 수 있을 것인가.

 

리더에게는 무능이 더 큰 악일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사람을 끝까지 믿고 따라도 좋은 것일까? 이 사람의 뒤만 보고 따라가도 과연 온전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새로운 낙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무능한 리더의 등만 보고 따라가다가 사라진 무리가 기록되지 않은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내 운명까지 맡겨야 한다. 못 할 노릇인 것이다. 리더는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시키는, 즉 동의와 복종을 받아내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이낙연에 대해 이해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더욱 그를 리더로서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낙연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이재명에게 역전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은 때로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곳을 건드리며 이슈를 주도해 왔었다.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부터 시작해서 홍남기의 재경부에 대한 공격까지,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 적폐청산을 이어가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과제를 찾아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그 논란의 한가운데 있으려 한다. 그러나 이낙연은 아니다. 이낙연은 한 번도 180석이라는 의석을 가지고서도 사람들보다 앞서서 걸음을 내딛고 그 중심에 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논란이 다 지나고 나면 그 뒤에야 느긋하게 뒤따라가는 타입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리더가 아닌 선대로부터 신분을 물려받았을 뿐인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민주당 180석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민주당의 개혁과제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내놓은 것이 이명박근혜의 사면이었다. 과연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낙연이란 인물에 대해 무엇을 느꼈겠는가.

 

압도적인 대군을 거느리고서도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서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사려깊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개헌을 제외하고 민주당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민주당은 과연 이 의석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마저 앞장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리더인 것이다. 거기서 이재명과 이낙연의 차이가 갈린다. 경기도지사로서 때로 범위와 한계를 넘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려 하는 이재명과 당대표로서 항상 머뭇거리고 있는 이낙연의 차이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두의 판단이 끝난 다음에 뒤늦게 움직여서는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 판단도 행동도 다른 사람보다 느린데 어떻게 그를 리더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내가 때로 불쌍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차기 대선주자 이낙연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되는 것이다. 리더가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쩌란 것인가. 앞으로 수 천만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인데. 행정가로서 신중함은 미덕이지만 리더에게 신중함은 우유부단함이다. 하물며 남보다 앞서가지도 못하고 자꾸 뒤만 돌아보는데 답이 있을까? 그 뒤돌아 보는 얼굴마저 항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도 잘만 키우면 차기를 노릴만한 인재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아주 희망이 없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당장 이재명을 대체할 만한 인물을 민주당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이 조금만 과감했다면. 조금만 더 무모했다면. 그 과감함과 무모함을 자신감과 능동성으로 만들어줄 힘을 민주당이 이미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면. 행동보수가 아니라 그냥 겁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겁쟁이도 리더로서 실격이다. 참 안타까운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