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본다는 뜻이지만 관은 시나 견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으며 목적과 의도가 있다.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다. 그래서 볼 관이지만 살필 관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경제관, 외교관, 복지관, 여성관, 세계관, 정치관 등등등이다. 이런 단어들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냥 벼락치기로 공부만 해서는 이런 관이 생겨나지 않는다. 관은 지혜지 지식이 아니다. 경제에 어떤 이론이 있더라. 어떤 사례들에 어떤 설명들이 있더라. 그런 모든 지식들을 아우르고 체계화한 뒤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를 통해 다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세계와 자신을 통하는 창구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걸 단 몇 달 전문가에게 벼락치기로 배운다고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 그것은 과연 자신의 관일 것인가?

 

아직 정치인으로서 역사와 경제와 외교와 행정과 통치행위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만의 관이 없다. 그러면 이미 정치인으로서 실격인 것이다. 그것을 배운다고 바로 얻을 수 있다면 관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리 없다. 무엇보다 그 관이 과연 자신이 가진 관과 일치하는가도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웃기는 게 그래도 진보를 자처한다는 한겨레가 수구언론과 같은 입장에서 그런 윤석열의 학습에 대해 찬양 일변도라는 것이다. 수구언론이 바라는 경제관, 노동관과 한겨레가 바라는 그것이 과연 같을 것인가.

 

아니지. 신민이란 군주의 관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윤석열이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 폭동이라 규정지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빨갱이들이 남파되어 일으킨 반란이었다면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노조는 악이다. 최저임금은 3천원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믿고 따르면 된다. 그런 의미인 것이다. 윤석열이 지금 누구에게서 어떤 내용을 배우고 있는가는 전혀 관심조차 없이 그저 배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환호하며 희열마저 느끼고 있다. 그를 찬양하기에 바쁘기만 하다. 달리 이해할 논리가 있을까?

 

역대 민주정부들이 관료들에 개혁의 발목을 잡혔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름대로 개혁을 위한 관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관료들의 전문성을 넘어설 정도로 치밀하지도 강고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타협하며 주저했던 것인데 그를 비판하던 자칭 진보가 윤석열의 학습을 칭찬하는 것은 어떤 의도일 것인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평소 관심도 없다가 몇 달 공부한다고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토론하면 드러난다. 지식이 부족해도 관이 확실하면 그 방향성만큼은 제대로 제시할 수 있다. 나머지는 따로 그 내용을 채워주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게 리더란 것일 테지만. 자칭 진보의 바닥이야 모르지 않으니. 똥걸레는 똥걸레다.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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