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순수한 감정은 공포다. 여기에 증오를 더해야 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공포와 증오에는 끝이 없다. 대개는 시작도 없다. 공포라 여기니 공포가 되고, 증오하게 되니 증오가 된다. 상대가 완전히 말살된 이후에조차 공포와 증오는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다.

 

그래서 공포와 증오는 단순하다. 논리가 필요없다. 공포는 공포이면 되고 증오는 증오이면 된다. 공포영화에 설명이 너무 많으면 곤란한 이유도 그래서다. 스릴러에서 악역에 대해 너무 많은 설명을 하다 보면 이야기는 깊어지겠지만 대신 스릴러로서 긴장감은 떨어지게 된다. 악은 그냥 악인 것으로 족하다.

 

이른바 보수유튜버에 비해 반대편의 리버럴 유튜버들은 진짜 말이 많다. 너무 많이 많고 논리도 복잡하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이 그만큼 복잡하니까. 반면 보수유튜버들은 논리가 참 단순하다. 저새끼 나쁜 새끼다. 저새끼 하는 짓거리 전부 나쁜 짓이다. 하긴 검찰 관련해서 리버럴 유튜버들의 논리도 거의 비슷하다. 최근 이낙연에 대한 발언들도 거의 비슷한 맥락을 이룬다. 똥파리들이 이재명에 대해 떠드는 것이나 비슷하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저 새끼는 나쁜 새끼고 저 새끼 내버려두면 반드시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 새끼 조져버리자. 더 이상 필요한가?

 

어째서 유튜브에서는 보수유튜브가 리버럴유튜브에 비해 더 극성인 것인가? 선택적 미디어의 한계인 것이다. 보편적 미디어는 어찌되었거나 보고 싶지 않아도 정해진 내용은 끝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선택적 미디어는 그냥 지 보고 싶은 것만 그 안에서도 골라서 볼 수 있다. 그러면 대중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포와 증오를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계산 없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케 만들기 때문이다. 저 새끼 죽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테러에 나설 수 있다. 저 새끼로 인해 내가 내 가족이 내 나라와 내 민족이 위험하다는 두려움 하나만으로 어린아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강간하고 고문하고 학살할 수 있다. 그래서 선동은 공포와 증오로 하는 것이다. 그 공포와 증오를 풀어내는 논리는 그만큼 복잡하고 정교하고 치밀한 반면 무력하다. 

 

그래서 무언가? 내가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에 기반해 쓴 글들이 예언이 되는 이유다. 나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증오이기도 하다. 증오는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아낸다. 내가 생각하는 자칭 진보와 부합하는 근거들이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믿게 된다.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언론이 하는 짓거리다. 보수유튜버들이 생산하고 있는 공포와 증오를 위해 근거를 만들어 제공한다. 한겨레 기자들 가운데도 아마 신의한수나 펜앤마이크, 혹은 가세연 구독자가 적잖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면 그를 뒷받침할만한 기사를 자신들이 생산해서 보충해준다. 아주 악질적인데, 그래서 보수유튜버가 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증언보다 더 자극적인 더 믿고 싶은 더 체계적인 근거들이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알릴레오는 공포와 증오에 맞서는 지성의 마지막 보루인지 모르겠다. 알릴레오가 심심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공포가 없다. 증오가 없다. 자극적인 그 무엇이 없다. 그저 온건하고 치밀한 치열한 지성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기자들도 관심이 없다. 아마 그 내용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기자도 이제는 거의 없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내가 김용민 유튜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김용민의 조급함은 공포에서 비롯된다. 증오에서 비롯된다. 이동형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물러나 있고, 김어준은 아예 가지고 놀려 한다. 그래서 그런 선동이 얼마나 먹히느냐면 현재 집권자는 문재인 대통령이고 집권당은 민주당이란 것이다.

 

도고일척마고일장이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도가 한 자 자라면 마귀는 한 길을 자란다. 보편의 진리다. 그 이유이기도 하다. 공포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드무므로. 아마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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