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객관적으로 사실만을 적시했을 때 지금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권리가 남성의 그것에 필적할 정도로 성장을 이루었는가 묻는다면 회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30대까지 젊은 남성들이야 느끼지 못할 테지만 30대 중반만 넘어가도 대부분 여성들은 그런 현실의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괜히 유리천장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천장이 부딪히기까지 얼마든지 남성을 추월해 앞서 달려갈 수 있지만 천장과 마주하는 순간 현실의 절망과 좌절을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현재 권력관계에서 여성은 약자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강자는 전체 여성 가운데서도 아주 소수의 여성주의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수많은 혜택을 누리며 남들과 다른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극히 일부의 여성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과대표되고 말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닌 기득권 남성에 기대어 휘두르는 그 권력으로 인해 정작 여전히 버거운 현실과 맞서 싸워야 하는 더 많은 여성들의 처지가 가려지고 만 것이다. 더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있는 기득권 남성들과 결탁한 여성주의자들로 인해 정작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의 처지가 잊혀지고 만다.

 

박원순 전시장 논란 당시 여성주의자들로 인해 정작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어느 여성 방송인의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작 남성들인 검찰 수뇌부를 움직여서 같은 여성인 검사들을 징계하려 시도한 예 또한 그런 일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앞서서 자신이 겪은 부당한 성폭력을 폭로한 당사자를 자신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며 폄훼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백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편에서 같은 여성인 피해자를 억압하는 그 어디에 여성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결국에 남성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마저도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할 수 있는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여전한 현실의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은 배제한 채 그런 여성들마저 억압하는 권력으로써 여성주의는 여성을 대표하게 된다. 대부분 여성들의 처지는 여전히 열악하기만 한데 그들과 상관없이 권력을 앞세운 여성주의자들로 인해 여성이 권력으로 인식되고 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남성이란 약자의 저항을 억압하려는 기득권의 연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남성주의라는 여성주의에 대한 저항이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같은 남성조차 그런 것은 꼴사나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뀌었다. 소수 여성주의자들의 전횡이 여성을 권력으로, 기득권으로 여기게 만들며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기득권에 대한,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여기게 만들고 말았다. 여성이란 이미 강자이고 기득권이기에 그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정당하다. 그래서 과연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 것인가? 

 

이를테면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겠다고 동맹인 미국을 등에 업고 점령지에서 횡포를 부리는 상황과 비슷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열강의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열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다가 정작 열강이 물러나고 나서는 약자로 전락해서 억압과 차별의 대상으로 전락한 소수민족의 예일 것이다. 약자라고 연민을 보이기에는 이미 그들 스스로가 강자로써 보인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저 동정해야 할 선량한 약자일 것인가. 여성주의자들이 저리 강자로써 전횡을 일삼는데 여성이란 보호하고 존중해야 할 사회적 약자인 것일까.

 

전략의 실패다. 여성주의가 아닌 진정 여성을 위하려 했다면 벌써부터 칼을 빼들어서는 안되었었다. 남성들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억압하려 해서는 안되었었다. 박원순 시장에 대한 공격은 그나마 여성주의에 우호적이던 대부분 남성들을 돌려세운 최악의 한 수였었다.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외의 어떤 주장도, 심지어 침묵마저도 여성주의는 용납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는 이미 권력이다. 여성은 이미 권력이다. 이미 기득권이 되어 버린 여성을 위한 여성주의란 것이 보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GS25나 박나래 등을 향한 남성들의 공격이 전과 달리 더 큰 호응을 받으며 힘을 가지게 된 이유인 것이다. 더이상 여성은 약자가 아니다. 오히려 남성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강자들인 것이다. 그런 강자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박나래는 그저 한 개인에 지나지 않지만 그 배후에 있는 여성은, 여성주의는 동정도 연민도 이해도 동의도 필요없는 그저 강자이고 기득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박나래를 봐주는 것은 그런 기득권에 굴복하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냐면 결국 섣부르게 손에 넣은 권력을 휘두르는데 급급했던 여성주의자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대부분 여성들과 달리 자신들만 기득권과 결탁하여 편입되었는데 그를 과시하느라 대부분 여성들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작 여성주의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그런 일반의 여성들마저 함께 싸잡히고 만다. 정작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이 누리는 그런 모든 것들과 전혀 상관없는 여성들마저 그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너무 성급했다. 조금 더 오래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때까지 여성을 약자로써 인식시켰어야 했다. 지금 여성이 사회적으로 약자인가 묻는다면 아마 여성 가운데서도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과 언론마저 거의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약자로서 관용을 베풀기에는 이미 그들 스스로가 권력이 되어 있다.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최소한 남성들의 행동이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는 약자의 저항으로 비쳐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이미 강자는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주의자들의 공적이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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