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약자들이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란 것이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약자이기에 더 엄격하게 대가를 요구하고, 그마저도 잠시만 마음을 놓으면 대가만 빼앗아가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회적 약자들은 과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불공정한 거래에 익숙하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한 가지를 얻으려 해도 내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 바로 노동자들이 파업을 파며 자신의 직업과 신분까지 걸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다가 정부가 보낸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나가던 것이 불과 한 세기 전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거우 한 세대나 지났는가 싶다. 아니 김대중 정부에서도 심지어 임산부들마저 파업을 진압하는 경찰에 의해 개처럼 얻어맞고 끌려나가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던 용산의 철거민들이 몇 명이나 목숨을 잃어야 했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시위에 나섰던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식을 잃고 후송되었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 바 있었다. 굳이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김대중 정부 이래 아예 돈줄을 말려 노조를 죽이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지금 진료거부중인 의사들이 비웃던 인력확충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간호사들의 투쟁이 결국 막대한 손해배상소송으로 인해 당사자들을 경제적으로 파탄낸 바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노동자들을 파업이라는 극한의 투쟁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말로 해서는 들어주지 않는다. 얌전히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다 지켜가며 요구했다가는 아예 듣는 척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심지어 목숨까지 내걸고 파업이라는 극한의 선택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업에 나섰다가 전경과 구사대에 처참하게 두들겨맞은 다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니다. 괜히 파업에 참여했다가 법을 어겼다고 전과자가 되어 재취업도 안되는 경우를 아주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손해배상소송으로 일가친척의 재산까지 모두 날리고, 그래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누군가는 홧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 아니면 지금의 부당한 현실을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테니까. 그런 노동자들이 만일 자신의 직급과 월급과 심지어 직업마저 내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가. 차라리 더이상 내가 이 일을 하지 않겠다. 물론 그런다고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질 만한 직업은 의사와 검사 정도일 것이다. 너 아니어도 사람은 많다. 의사도 많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의사고시를 거부하겠다. 정부가 지금의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려 한다면 자신들은 의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겠다. 즉 의사라고 하는 자신이 의대에 입학한 의미 자체를 건 투쟁의 방법인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너무 부당하고 결국 국가와 국민에 피해가 돌아갈 것이기에 의사라고 하는 자신의 미래까지 걸고 투쟁에 나서겠다. 그런데 의사고시를 미뤄달란다. 구제할 방법을 마련해 달란다. 그러니까 이번 의사고시만 거부할 뿐 의사라는 미래까지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의사는 될 것이다. 단 이번 시험만 거부하는 것 뿐이다.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 전임의들을 고발하고 불이익을 주겠다 하니까 그것도 하지 말란다. 그게 준법투쟁이다. 역대 다른 노조위원장들도 파업이 끝나고 검경이 체포에 나서면 도망치고 숨어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예 파업중단의 조건으로 관련자의 처벌면제를 요구하는 경우도 상당했었다. 그러나 대부분 노조원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파업에 불법적인 요소가 있으면 누군가는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누가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것인가도 사전에 미리 정하고는 한다. 만일 그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물론 그 과정에서 법정에서 처벌이 정당한가를 다투는 과정이 있기는 하다. 중요한 것은 법을 어기고 투쟁하는 만큼 법을 어긴 데 따른 책임은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을 어기고 정부를 거스르면서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만은 면제해달라.

 

즉 지금 의사들은 법을 어기고 정부의 정책에 맞서 환자를 인질로 삼는 극한의 선택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어떤 각오도 다짐도 없이 어느것도 걸지 않은 상태란 것이다. 의사고시도 포기 못한다. 처벌이나 징계 등 불이익도 받지 않겠다. 그러나 환자에 대한 진료도 거부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마음대로 하겠다. 왜?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되는 존재니까. 기자들이 의사들이 이런 방식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사를 쏟아내는 이유일 것이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의사들이 하는 짓과 기자들이 하는 짓이 너무 닮았다. 공부 열심히 잘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남들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째서 한겨레와 경향은 부르주아 여성들의 여성주의에는 그토록 집착하면서 진짜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 노동자들의 문제에는 냉정하기만 한 것인가.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가운데 대졸자가 몇 명인 것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국민들도 아는 것이다. 심지어 의사들의 파업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질극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최소한 자기 의사면허라도 내걸던가. 의사로서 자신의 미래라도 걸어 보던가. 당당히 징계든 처벌이든 받겠다고 나서는 모습이라도 보이던가. 그러면 의사로서 자신을 내건 것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진료거부로 위태로워진 환자들의 생명과 안전만을 이유로 내세운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환자가, 나아가 국민이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이런 걸 뭐라 이해해야 할까?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켜봐 온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처절하게 사용자와 정부와 맞서 싸워 왔는지 그 역사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 파업을 위해 무엇을 걸었고 어디까지 희생해야 했는지 그래서 상당히 알고 있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파업이라? 투쟁이라? 그깟 가운 하나 밟는게 그리 대단하게 떠들어야 하는 일이던가. 너무 귀하신 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기자같은 것이기도 하다. 언론같고 교회같다. 의사란 것들이.

 

의사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의사들 자신이 보이는 모습이 그리 한심하다는 것이다. 당당하지도 못하고 단호하지도 못하고 처절하지도 간절하지도 못하다. 어린애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과자 사달라고 땅바닥을 뒹굴며 떼쓰는 꼬라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정도로도 그리 비장해질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영혼까지 찌들어 있다는 것인가. 벌레는 답이 없다. 이런 놈들이 이 사회 엘리트라 불리는 놈들이다. 유은혜부터 때려잡아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한심한 꼬라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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