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단지 생산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란 생산에서 자본을 분리해내는 것이다. 자본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과 그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을 분리함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를테면 동네빵집과 대형프랜차이즈 빵집과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아닌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 소자본 빵집의 경우 가게 사장이 곧 제빵사고, 가게 사장이 만드는 빵의 품질에 의해 가게의 매출이 결정된다. 생산과 자본의 이익이 일치된 상태인 것이다. 분식점주인이 만드는 떡볶이가 맛있어서 멀리서까지 사람이 찾아오고, 국숫집 주인이 만드는 국수가 맛이 없어서 며칠 안 가 문을 닫는다. 그에 비하면 대형 프랜차이즈는 빵 만드는 사람 따로, 빵을 파는 사람 따로,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다. 어떤 빵을 만들 것인가조차 제빵사가 아닌 경영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경영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을 투자한 자본가들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제품의 품질을 떨어뜨리고 인력을 감축하는 결정도 아무렇지 않게 내릴 수 있다. 반드시 빵이 많이 잘 팔려야지만 자본이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생산과정에서의 소외가 일어나는 이유다. 한 마디로 보람이 없다. 빵을 만들면서도 과연 이게 내가 만드는 빵인지, 내가 만든 빵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과연 내가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주어진 레시피대로 그저 기계처럼 반복해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전체 생산과정 가운데 단지 제빵사로서 자신의 실력이 필요한 일부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그같은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자동차에 쓰이는 중요한 부품이지만 캠이나 크랭크를 제작하는 하청기업 종업원은 생산된 차를 직접 볼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왜 만들고 어디에 쓰이는지조차 모르는 채 전체도 아닌 일부 공정만을 반복할 뿐인 노동자에게 과연 얼마나 대단하게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런 노동자는 무엇에서 자신의 노동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많은 사용자들이 가족이 있는 기혼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이 있으면 가족의 생계 때문에라도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 보람 없이도,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음에도, 그러나 자기가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만큼 가족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노동자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며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일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는 만큼 일의 결과로써 자신의 보람을 찾으려 한다. 밖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봉투들이 바로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없거나,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부양할 가족을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장 청년실업률만 보더라도 일자리가 없다는데 사람이 없어서 문을 닫을 지경인 회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어째서 고용률이 30대만 되면 바로 치솟는가에 대해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을 것이다. 20대까지는 여기저기 고르며 버티다가 30대 되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건을 낮춰서 아무데고 취업하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와중에도 도저히 그 돈 받고 그 일은 못하겠다며 거부하는 일자리가 상당한 것이다. 일본의 고용률이 우리보다 높게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노동자라도 없으면 안되는 곳에서마저 일본인들은 일본인을 고용해 쓸 수 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은 그런 일자리를 회피하는 것일까? 일도 보람이 없는데 일해봐야 기대할 것도 없다. 지금 최저임금 수준으로도 보람도 없는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일을 청년들이 왜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해야만 하는가?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게 된다. 어느새 남은 것이 그런 일자리들 뿐이니까. 거의 대부분 일자리가 최정임금이나 겨우 받는 정도다. 그조차도 고용이 보장되지 않아 몇 년 뒤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 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기껏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는데 계약이 끝나 실업자 신세가 되어 보라. 돈을 모을수조차 없는데 일자리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급여와 상관없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젊은이들의 경우 결혼률이나 출산률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 부양할 가족도 없다면 의미없는 일에서 어떤 보람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하긴 가족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고생한 결과 가족이 행복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이 고생한 결과에 스스로 보람과 의미를 찾는 것도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에 대해 방송했을 때 다른 네티즌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에게 상을 준다. 그동안 노력하며 고생한 자신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을 해 준다. 그것이 파인다이닝일수도 있고, 클래식공연일 수도 있으며, 해외여행일수도 있다. 그 순간 행복해하는 자신을 위해 자신은 그만큼 더 노력하며 버틸 수 있다.

 

요즘 부쩍 지출이 는 이유다. 일이 힘든 때문이다. 일도 일이지만 그다지 보람 같은 걸 느끼기 힘들다는 게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냥 열심히 하는데 그것 뿐이다. 그래서 받는 돈은 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많은 액수다. 내가 혼자 살면서 이런저런 고정지출 포함해서 한 달에 지출하는 액수가 고작 얼마간이다. 그런데 거의 그 두 배 가까운 돈을 받는다. 아 씨발 그냥 딱 저 절반만 받고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의미있는 일을 찾아볼까?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돈을 쓴다. 돈을 버는 만큼 나 자신을 위한 보상에도 아끼지 않는다.

 

물론 한계가 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겨우 주말이나 되어야, 그것도 낮에는 자야 하니 밤에만 겨우 시간이 난다. 그래서 미뤄두었던 게임도 질러 보고, 술도 조금 더 비싼 놈으로 마셔 보고, 그에 맞게 안주도 그럴싸한 것으로 준비해서 먹는다. 사실 가장 큰 게 술이다. 알콜중독이라기에는 주중에는 진짜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냉장고에 술병들이 가득한데도 그냥 외면하고 술없이 일주일을 버틴다. 술에는 안주가 따라와야 한다. 그리고 안주는 비용이나 공이 많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주중에는 시간이 없어 그것이 힘들다. 그리고 그렇게 수고와 비용이 들어간 안주를 제법 괜찮은 술과 함께 즐기며 주말의 한가함을 즐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일주일동안 개고생하는 것 아닌가.

 

문득 벌써 10년도 더 전에 거북이가 재해석한 '사계'에 대해 크게 반감을 드러내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일을 하는 의미도 보람도 사라진 시대에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한 무산자 노동자들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가. 그런 자신을 위해 비장함도 엄숙함도 숭고함도 아닌 하잘것없고 대수롭지 않은 그저 자신만을 위한 순간들이 필요치 않을까.

 

맥주 한 잔에, 매운 치킨 한 마리에, 그리고 어느새 보채다 잠든 고양이를 보면서 드라마도 볼 것 없어 끄적이는 중이란 것이다. 원래 계획이 있었는데 힘든 일일수록 피하고 싶은 것이 나란 인간이라. 일주일의 고단함을 주말의 하잘것없음으로 이완시키며 풀어본다. 내일도 마실 거다. 더 맛있는 안주와. 내가 살아가는 이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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